[교회비평]

 근래 들어 한국 천주교회 내부에서는 ‘사회교리’에 대한 관심이 부쩍 증대되고 있다. 각 교구마다 설치되어 있는 ‘정의평화위원회’를 주축으로 신자들에게 사회교리를 가르치는 일들을 적극적으로 시행하고 있고, 한국주교회의는 2012년 ‘추계주교회의 총회’에서 ‘사회교리주간’을 제정하여 ‘인권주일’ 제정 30주년이던 지난해 12월의 인권주일(대림 제2주일)부터 1주간 동안 사회교리주간을 지낸 바 있다.

한국교회가 ‘사회교리주간’을 제정한 것은, 신자들이 사회교리에 관심을 갖고 교회 가르침을 좀 더 적극적으로 내면화하고 실천하도록 독려하기 위해서다. 사회교리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정치ㆍ경제ㆍ인권ㆍ노동ㆍ환경ㆍ생명 등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적 시각으로 성찰하고 정리한 교회의 공식 가르침이다.

 ⓒ한상봉

‘사회교리’의 본질

한국교회가 사회교리에 대한 사명감과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발하는 것은 교회 내부의 보수적 기류에 대한 성찰에서 기인한 측면이 크다. 그동안 교회의 보수화에 대한 우려는 실로 컸다. 갖가지 사회 현상들에 대한 무관심과 방임적 자세는 그리스도의 복음 정신에 반하는 것이라는 지적이 수없이 제기되어 왔다.

갖가지 사회 현상들을 그리스도의 복음 정신으로 보기보다는 자신의 시각과 잣대, 또는 이익에 따라 판단하고, 정교분리를 내세워 방임하거나 부화뇌동하는 태도들이 교회 안에 만연되어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따라 교회는 외형적인 성장과는 달리 복음 정신이 왜곡되거나 약화되는 현상을 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현상을 잘 알면서도(또는 전혀 모른 나머지) 일부 고위 지도자들은 신자들의 분열을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교회의 보수화를 부채질하는 언행을 보여 왔다.

하지만 신자들의 분열을 우려하기보다는 복음정신의 상실을 더 우려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더욱 설득력을 지닐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런 자각에 힘입어 한국교회는 근래 들어 새롭게 쇄신을 시도하고 있다. 그것의 실례가 사회교리를 확대하는 일로 나타나고 있고, 지난해 사회교리주간을 제정하는 일까지 진일보했다.

사회교리가 신자 일반에 내면화되고 생활화되는 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이런저런 형태의 반작용도 생겨날 것이다. 하지만 사회교리는 오늘의 한국교회가 뜨겁게 안고 가야 할 ‘보화’이며,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그 대세를 막지는 못할 것이다.

본당공동체의 사목회장도 역임하는 등 나름대로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필자는 형제자매들과의 신앙생활에서 아득한 거리감과 이질감 같은 것도 자주 감내하곤 한다. 그리스도의 복음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신자들이 너무도 많다. 교회의 공식기구인 정의평화위원회의 존재 이유와 활동사항들을 거의 모르고 있는 신자들도 많고, 정의구현사제단을 부정적인 눈으로 보는 신자들도 많다. 이런저런 사회 문제들에 대해 복음의 눈으로 보기보다는 일방적이고 편협한 자기만의 잣대를 마구 들이대는 신자들도 있다.

여기에서 나는 기본적인 교리지식마저 취약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신자들의 모습을 보곤 한다. 가톨릭교회의 ‘믿을 교리’는 기본적으로 ‘사회교리’를 내포하고 있다. 굳이 사회교리라는 말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즉 신자들에게 기본적인 교리를 잘 가르치는 것만으로도 사회교리의 영역을 확보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사회교리는 가톨릭교회 교리의 ‘실천’, 복음정신의 구현을 위한 가르침일 뿐이다.

사추덕의 은총을 더욱 절절히 소망하는 삶

천주교 신자들이 반드시 익혀야 하는 교리 중에 ‘사추덕(四樞德)’이라는 게 있다. <가톨릭교리서> 안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천주교 신자들이 마음에 새기고 몸에 익혀야 할 네 가지 덕행에 대한 가르침이다. 네 가지 덕이 모든 덕의 ‘중추적’ 구실을 한다는 뜻으로 사추덕이라고 부른다.

곧 현명, 정의, 용기, 절제이다. 이 네 가지 덕은 사계절처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밖의 수많은 덕행과 연관되거나 포괄한다. 천주교 신자가 이 네 가지 덕행을 마음에 새기고 몸에 익힌다면 신자로서의 규범을 온전히 드러내며 완덕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천주교 신자들 중에 사추덕을 내면화하고 생활화하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일방적인 생각일까?) 또 가톨릭교리 안에 ‘사추덕’이라는 게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속단일까?)

사추덕 중에서 맏이가 되는 것은 ‘현명(賢明)’이다. 지혜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선은 현명하고 지혜로워야 갖가지 덕을 추스르고 삶의 규범을 바르게 세워나갈 수 있다. 그래서 현명을 ‘덕의 마부(馬夫)’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현명은 저절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공부와 자기연단이 필요하다. 책도 읽고, 고뇌도 하고, 탐구심을 길러야 현명을 얻을 수 있다. 현명을 얻게 되면 분별의 눈이 커져서 정의를 알게 된다. 정의를 알지 못하면 현명을 제대로 얻은 게 아니고, 올바른 현명이 아니면 오히려 불의와 친밀하게 된다. 정의와 불의를 분별하게 하는 현명이 진짜 현명이다.

정의(正義)는 양심과 윤리의 기초다. 사람의 도리에 대한 분명하고도 확고한 의지다. 하느님께 대한 정의, 즉 ‘경신덕’의 기초가 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에 대한 정의, 즉 ‘공동선’을 낳는다. 이 공동선에는 자유, 평등, 공평, 공존, 평화, 조화 등등이 포괄된다.

천주교 신자들은 성경 안에서 ‘의로운’이라는 말을 자주 접한다. 그러면서도 ‘의로움’에 대한 생각을 별로 하지 않는 것 같고, 실제 삶 안에서는 별로 필요치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현명으로 말미암은 정의는 용기(勇氣)를 배태한다. 용기를 낳지 않는 정의는 정의가 아니거나 죽은 정의다. 정의를 현실화하려는 용기는 당연히 고난과 맞서 싸운다. 많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단호하고 꾸준하게 선을 추구하도록 하는 양심의 표발이 바로 용기다. 윤리적인 덕이면서 동시에 경신덕으로부터 힘차게 발현하는 덕이다.

현명과 정의와 용기는 당연히 절제(節制)를 동반한다. 절제는 균형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올바른 용기와 만용을 구별하게 하고, 비겁함을 식별하게 한다. 절제는 중용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중용이라는 이름으로 용기없음을 분식하려는 것을 제어하기도 한다.

음력으로도 해가 바뀌었다. 대선 이후라서 나처럼 지속적으로 ‘후유증’을 겪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그래서 더욱 마음 다잡고 뜨겁게 심기일전하는 자세로 ‘사추덕’을 추구하며 살고자 한다. 가톨릭교리 안에 존재하는 사추덕을 모든 신자가 내면화․생활화하고, 특히 ‘공인’이라는 명색을 걸치고 사는 이들이 사추덕의 규범적 자세를 앞장서 보였으면 한다. 새해의 뜨겁고도 절절한 소망이다. 

지요하 (막시모. 소설가. 대전교구 태안성당 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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