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과 깊은 관련이 있는 질문으로 흔들리는 오늘날의 세상에서 교회를 다스리고 복음을 선포하려면 몸과 마음의 힘이 모두 필요합니다. 지난 몇 달간 저의 기력은 제게 맡겨진 직무를 수행하기가 불가능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약해졌습니다. 저는 이러한 이유로, 또한 이 결정의 중대함을 잘 인식하면서, 완전한 자유의사에 따라 2005년 4월 19일 추기경단이 제게 맡긴 성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직의 포기를 선언합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85세)가 11일 오전 추기경회의에 참석해 오는 2월 28일 교황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사임의사를 밝혔다. 언론에서는 갑작스런 교황의 사임에 대한 배경에 관심을 모으고 있는데,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건강상의 이유가 제일 큰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교회의 한 소식통은 그 동안 가톨릭교회 안에서 불거져 나온 여러 가지 스캔들로 교황직 수행이 어려웠을 것이라 전하며, 베네딕토 16세가 사임 성명에서 ‘육체적’ 어려움 뿐만 아니라 ‘영적’ 어려움도 토로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 사진출처/ 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Pope Benedict XVI's Christmas Blessing in different languages and Urbi et Orbi (2012)

베네딕토 교황 사임, 교황종신제 벗어나는 선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도 미리 <교황 사임서> 준비했다

종신제인 교황이 선종 이전에 사임한 사례는 1415년 동서교회의 분열을 수습하는 차원에서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으로 교황 그레고리우스 12세가 사임 한 이후에 598년만의 일이다. 미국가톨릭언론인 <가톨릭뉴스 서비스(Catholic News Service)>는 전임 교황인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역시 지난 1989년과 1994년에 추기경단에 제출할 <교황사임서>를 비밀리에 준비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만일 자신이 질병이나 또 다른 사유로 더 이상 교황직무를 수행하지 못할 것을 대비해서 미리 작성해 놓은 것이다. 또한 <가톨릭뉴스 서비스>는 1994년에는 교황도 다른 주교들처럼 75세에 은퇴하는 게 적절하지 않느냐고 자문을 청한 적이 있다고 전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독일 언론인 페터 제발트와의 인터뷰 이후 발표된 책 <세상의 빛―교황, 교회, 그리고 시대의 징후>에서 “육체적 · 정신적 · 영적으로 교황 업무 수행이 어렵다고 느낄 경우 사임할 권리가 있다”면서 ”육체적인 면에서 내가 교황 업무를 해낼 수 있을지 걱정되고 의문이 들기도 한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러나 그동안 이 권리를 누릴만큼 용기 있는 교황은 별로 없었다는 점에서 베네딕토 교황의 이번 결단은 의미가 깊다.

신체적 어려움과 교회 안의 복잡한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이번에 교황좌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한 것은 교황 종신제가 고착되어있는 가톨릭교회 전통에서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건강상 이유든 무엇이든 교황직무 수행이 어려운 상황에서 스스로 물러나는 모습은 교회에 좋은 선례로 남을 것이다. 실상 교황직을 제외하고는 가톨릭교회 직무 가운데 종신직은 없다. 추기경과 주교 등은 신분이지만 교회직무를 의미하는 교구장직 등은 모두 정년이 있다.

성직자 아동성추행, 바티칸은행 돈세탁 파문..
여성사제 반대 등 보수적 입장으로 교황 지지율 낮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독일 출신으로 2005년 78세의 나이로 교황에 선출되었으며, 학자 출신의 첫 교황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라칭거 추기경 시절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을 역임하면서 그가 보여주었던 보수주의 관점 때문에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전임교황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와 더불어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교회개혁을 후퇴시킨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해방신학자인 레오나르도 보프는 <교회: 카리스마와 권력>이라는 책 때문에 라칭거 추기경에게 소환당해 곤욕을 치렀다. 결국 보프는 교권의 압력에 저항하다 1992년 사제직을 벗었다. 보프는 그동안 줄곧 교황을 비판해 왔는데, 독일 주간지 <슈피겔>와 인터뷰에서 “현 교황의 제1 관심사는 바티칸이라는 권력기구를 공고히 하는 것”이라며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교회를 위한다면서 되레 교회의 목을 조이는 천사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교황은 2009년 아프리카를 방문해 “AIDS의 대응방안으로 콘돔을 배포하는 것은 적절한 해법이 아니다”고 발언해 물의를 빚었다. 당시 각국 정치권과 국제 보건 담당자들은 콘돔이 에이즈 바이러스의 확산을 80% 줄여준다는 조사결과를 무시하고 인간의 생명보다는 교리를 우선시하는 잔인한 처사라고 반발했다. 그 후 프랑스 가톨릭신자의 43%가 교황이 사임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최근에 성직자들의 아동성추행 사건이 연이어 폭로되면서, 교황에 대한 신뢰도 또한 추락했다. 주간지 <스테른>의 여론조사를 보면, 미국뿐 아니라 고국인 독일에서조차 24%의 독일인만이 베네딕토 교황을 신뢰한다고 응답했으며, 가톨릭교회에 대한 신뢰도 역시 17%로 추락했다.

게다가 바티칸 은행의 부정부패, 돈 세탁 등을 다룬 내부 문서들이 공개되면서 교황청이 궁지에 몰리기도 했다. 이른바 ‘바티리크스’(VatiLeaks)라고 부르는 교황청 문서에 따르면, 바티칸은행은 유력한 정치인들과 심지어 마피아의 돈세탁 경로로 이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교황청은 스위스 출신 금융비리 전문가를 고용해 개혁에 나서긴 했지만, 교황이 이제 사임을 발표한 지금 이마저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적지 않아 보인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최근 잇달아 교회 내 보수집단으로 알려진 오푸스 소속 주교들을 각 대륙의 교구장으로 임명하고, 교황청과 관련된 모든 언론과 출판물 등의 홍보 전략을 총괄하는 임무를 맡은 홍보·커뮤니케이션 수석 고문에 오푸스 데이 회원인 그렉 버크를 임명했다. 따라서 교황청이 오푸스 데이에 의해 장악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아왔다. 또한 유럽과 미국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사제 독신제, 여성 사제 서품 문제 등에 대해서도 보수적 견해를 대변해 왔다. 따라서 베네딕토 교황의 사임과 새로운 교황의 선출이 가톨릭교회 내부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콘클라베, 만장일치 아냐
아프리카와 남미 출신 교황 나올 가능성 높아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후임은 2월 24일 추기경단 회의를 거쳐 3월 말쯤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교황청은 새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Conclave)’가 오는 부활절(3월 31일) 이전에 열릴 예정이라고 밝혔다. 교황청은 “교황이 선종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추모 기간 없이 바티칸 추기경 회의를 신속하게 집행할 것”이라고 어제 밝혔다.

콘클라베란 ‘열쇠로 잠근다’란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한 명칭이며, 교황 선거 투표권을 지닌 80세 미만의 추기경들이 투표를 시작하면 교황을 선출할 때까지 나오지 못한다는 관행에서 비롯됐다. 추기경들은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첫날 한 번, 다음날부터는 하루 두 번씩 투표를 한다. 보통 12일 동안 30차례 투표를 진행하며 이때까지도 3분의 2 이상 득표자가 없으면 다수결로 교황을 선출한다. 콘클라베가 만장일치 투표라는 것은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현재 교황 후임 인선과 관련해서 두각을 나타내는 후보는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동안 드러난 교계의 염원을 고려한다면 비(非) 유럽 출신 교황이 선출될 가능성이 크다. 사상 첫 아프리카 출신 교황이 나올 거란 기대도 높아지고 있다. 전 세계 가톨릭 인구 3분의 1이 아프리카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05년에도 현 교황인 베네딕토 16세와 최종까지 경합했던 인물은 나이지리아의 프란시스 아린지 추기경이었다. 다만 그가 80세의 고령이라는 점이 걸림돌이다. 또한 현재 교황청 정의평화 위원회 의장을 맡고 있는 가나 출신의 피터 턱슨 추기경도 강력한 교황 후보로 꼽히고 있다. 그는 ‘교회의 세계화’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자 다양한 종교들과 소통하는데 적임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리고 영원한 교황 후보라는 명칭을 얻은 크리스토퍼 쇤버른 오스트리아 빈 대교구장도 후보 가운데 한명으로 꼽힌다. 한편 전 세계 가톨릭 신자의 42%를 차지하고 있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새로운 교황 탄생할 가능성도 높다.한편 한국교회는 교황청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데 비해 아직 추기경은 단 한명 뿐이며, 그마저도 이미 81세로 교황에 대한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없는 상태다.

새 교황,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 다시 계승해야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사임을 표명한 2013년은 때마침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소집했던 요한 23세 교황이 사회회칙 <지상의 평화>를 발표한 지 꼭 50주년이 되는 해다. 요한 23세는 1962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 첫 회기를 마치고, 이듬해인 1963년 4월 11일 <지상의 평화>를 발표하고 같은 해 6월 3일 선종했으며, 후임인 바오로 6세 교황은 공의회를 계속할 것을 선포했다.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 교황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지난 세기의 전통적인 교회를 현대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안타깝게도 그 뒤를 이은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이 공의회를 후퇴시켰다는 비난을 받아 왔다. 그들은 공의회 정신을 계승하려던 한스 큉과 스킬레벡스 등 진보적인 신학자들과 억압적인 라틴아메리카 현실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강조했던 해방신학자들을 단죄했다. 그리고 실효성 있는 사목과 평등한 교회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제기되었던 사제 독신제와 여성사제 서품 논란을 차단하고, 이슬람과 마찰을 빚으며 유럽 중심주의를 고수했으며, 현대 세계의 다양한 도전에 대해 대화보다는 전통적 교리로 마감하려 애썼다.

이제 새로 선출될 교황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계승하는 차원에서, 현대세계와 더 넓게 소통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충실한 교황이기를 바란다. 요한 23세 교황은 선출당시에 첫 발음으로 ‘착한 목자’가 되리라 다짐했고, 공의회를 열면서 교리를 다투는 회의가 아니라 ‘사목적 공의회’가 되기를 희망했다. 그 첫 마음을 회복하는 교황이 선출되길 바란다. 그래서 교회의 답답한 창문을 다시 활짝 여는 교회가 되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요한 23세 교황이 봉헌한 짧은 기도를 소개한다.

오 주님,
우리가 물을 담아두지 못하는
깨진 항아리가 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현세의 좋은 것들을 즐기느라
눈이 멀지 않게 하시고,
필요한 최소한의 식량이 바닥나고
벌거벗은 몸을 가릴 옷도
가족이 한 지붕 밑에 모여 살 집도 없는
무수한 우리 형제들과
가난한 이들,
병자들과 고아들의 외침을
우리 마음이 그냥 지나치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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