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마태오 복음 6,1-6. 16-18>

[빠더 푸코의 명상]

▲ 아담과 이브(루카스 크라나흐)
“사람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십시오.”

이마에 재를 얹어 주는 사제의 목소리도
잿빛으로 가라앉은 재의 수요일 아침,

꽃 한 송이 없는 제단 앞에서 눈을 감으면
삶은 하나의 시장기임이 문득 새롭습니다.

죽어가는 이들을 가까이 지켜보면서도
자기의 죽음은 너무 멀리 있다고만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 속에 나도 숨어 있습니다.

아름다움의 발견에 차츰 무디어 가는
내 마음을 위해서도
오늘은 맑게 울어야겠습니다.

먼지 낀 마음의 유리창을
오랜만에 닦아 내며 하늘을 바라보는 겸허한 아침,
땅도 사람도 가까워질 수 있음을 새롭게 배웁니다.

사랑이 없으면 더욱 짐이 되는 일상의 무게와
나에 대한 사람들의 무관심조차
담담히 받아들이는 일,
이 또한 기도의 시작임을 깨닫는
재의 수요일 아침입니다. 

“재의 수요일 아침에”라는 이해인 수녀님의 시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더욱 짐이 되는 일상의 무게와 나에 대한 사람들의 무관심조차 담담히 받아들이는 일, 이 또한 기도의 시작임을 깨닫는 재의 수요일 아침”이라는 시구가 유독 마음에 와 닿는 시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더욱 짐이 되는 일상”입니다.

오늘은 사순시기를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미사 중에 이마에 재를 얹는 예식을 통해 '흙에서 왔으니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창세 3,19)을 생각합니다. 흙은 인간 존재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증언하는 첫 인류인 아담(םדָאָ)이라는 이름도 ‘흙’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아다마’(המדא)에서 나왔습니다. 또한 인간을 의미하는 영어 ‘휴먼’(Human) 또한 라틴어 ‘호모’(Homo)에서 비롯되었는데, 이 역시 ‘흙’을 뜻하는 라틴어 ‘후무스’(Humus)가 뿌리입니다. 인간은 이래저래 흙과 필연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이마에 재를 얹으며 ‘흙에서 왔아으니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 상기하는 이유는 우리의 현세적 삶이 허무하다는 것을 뜻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사람이라는 존재의 근원, 즉 우리의 본성이 바로 흙이라 점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허무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받은 본성답게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 나라의 삶, 즉 부활의 삶을 준비하는데 그 깨달음을 ‘재’ 즉 ‘흙’을 통해서 얻으라는 것입니다.

‘흙’의 성질은 더 이상 낮춰질 수 없는 ‘최저의 낮음’, 그리고 한 줌의 힘으로도 바스러지는 ‘연약함’입니다. 이를 그리스도교 용어로 바꾼다면, 바로 ‘겸손’입니다. 영어에서 겸손을 뜻하는 단어 ‘휴밀리티’(Humility)는 라틴어 ‘후밀리스’(Humilis)에서 왔습니다. 이 ‘후밀리스’ 역시 ‘사람’을 뜻하는 라틴어 ‘호모’(homo)처럼, ‘후무스’(Humus, 흙)를 어원으로 두고 있습니다. 즉 겸손은 ‘흙’과 같은 태도를 말합니다.

사람은 흙에서 나왔고, 흙의 성질은 겸손함이니, 사람이 사람답게 되려면 흙과 같아져야 합니다. 또한 겸손하지만, 빙엔의 힐데가르트 성녀의 말씀처럼 생명을 품고 있는 ‘흙’과 같이 되려면, 결국 사람을 살리는 겸손의 영성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께서도 역시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가 “자선을 베풀 때” “기도할 때” “단식할 때” 어찌해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깨우침을 주십니다. 예수께서는 ‘자선’과 ‘기도’ 그리고 ‘단식’을 “의로운 일”(6,1)이라 단언하십니다. 이러한 “의로운 일”을 행할 때, 즉 자선을 할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6,3), 기도할 때에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6,6), 단식을 할 때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고”(6,17) 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의로운 일은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 인정을 받기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상대방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자선’하고 ‘기도’하고 ‘단식’해야 하는 이유를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세상 사람들의 칭찬이나 시선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시선’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시선을 인식하기 시작하면, 겸손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숨은 일도 보시는” “숨어 계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해인 수녀님은 “먼지 낀 마음의 유리창”을 닦아내면, 하늘도 새롭게 보이는 “겸허한 아침”이라고 재의 수요일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하늘과 “가까워질 수 있음을 새롭게 배우”는 방법이라고 시를 통해 전합니다. 겸손은 하느님을 새롭게 만나는 방법이며, 장소입니다.

사순을 시작하는 오늘, 내가 아닌 남을 살리는 흙처럼, 또한 십자가의 길이 부활의 길임을 깨닫는 하루였으면 합니다.
 

 
 

김홍락 신부 (가난한 그리스도의 종 공동체)
교부학과 전례학을 전공했고, 현재 필리핀 나보타스(Navotas)시 빈민촌에서 도시빈민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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