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선교일기]

쁘람삐 마까라. 크마애말로 '쁘람삐'는 일곱, '마까라'는 1월이다. 1월 7일. 크마애들은 1979년 이 날을 뽈뽇이 주도했던 '붉은 크마애' 공산정권이 무너진 날로 기념한다. 아니 어떤 이들은 베트남 공산정권이 황폐해진 캄보디아를 통치하기 시작한 날로 기억하겠지.

지난 쁘람삐 마까라에는 캄보디아 전국 교회회의장에 앉아 있었다. 프놈뻰 교구가 새로 매입한 프놈뻰 북서부 개발지역의 6 ha 남짓한 부지는 횅했고 담장만 둘러쳐져 있다. 주교, 사제, 수도자, 그리고 신자 대표들이 참석해, 앞선 이틀 동안 기도, 복음 선포, 종교 간의 대화, 성소, 대중매체,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 교육, 사회 참여라는 7개의 소주제로 회의를 한 뒤였다.

아직도 잡초가 그대로인 맨 땅이라 기우뚱거리는 의자에 엉덩이를 조심스레 걸친 채 단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나라 야외 음악 콘서트에서나 보는 조립식 철골 구조물에 빼곡히 조명을 달아놓은 높고 튼튼한 제단용 단상을 빼고는 그 주변으로 늘어선 이틀간 회의를 치른 일곱 동의 주제별 토론 천막이나 앉아 있던 단상 앞 신자석 천막은 모두 결혼식이나 장례식 천막 대여업체에서 쳤다.

단상 위 하얀 칠판 위에는 강의 내용 요약인 듯 간단한 그림과 몇몇 문장이 쓰여 있었다. 내가 앉아 있던 뒷자리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옆에 있던 친구 신부에게 “앞으로 가자” 하고 일어서니 휴대 전화 문자를 확인하던 친구 신부는 “어딜 가? 여기 뒤에 조신하게 앉아있지.” 하고 못마땅한 얼굴이다. “네가 모시는 퐁쇼 신부님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해서 이야기 하신다잖아. 캄보디아에서 언제 이런 강의 또 듣겠냐. 잘 보이는 데로 가자.” 하고 일어나 앞자리로 걸어갔다.

▲ 뽀쩬똥의 아오자이 ⓒ김태진
앞으로 나가면서 보니 신자들 얼굴 위에 천막 색이 드리워져 발갛고 노랗고 파랗다. 얼굴을 아는 사람들이 인사를 보내왔다. 그들 중에 뽀쩬똥 성당 사목회장이 있다. 공동체 대표로 베트남계 본당 신자들을 인솔해 온 모양이다. 2002년 부활절에 처음 뽀쩬똥 베트남 공동체를 방문했을 때는 공항 옆 4번 국도에서 허허벌판 뒤로 가물가물하게 작은 시멘트 공소와 베트남 사람들 나무집 몇 채가 보였다. 벌판을 가로질러 성당에 들어섰을 때 부활절 잔치를 한다고 성당 마당에서 개를 잡아 그슬리고 있었고 부활 미사 내내 개털 노린내가 베트남 여자아이들이 입은 햐얀 아오자이와 뒤섞였다. 재작년에 회의차 자리를 비운 본당 신부 대신 미사를 갔을 때 그 뽀쩬똥 성당은 큰길가를 따라 들어선 주상 복합의 2층 연립 건물들 뒤로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는 원래 베트남군인 공동묘지였다.

지금도 성당 앞 담장으로 가려진 공터에는 묘지 몇 기가 남아있다. 1979년부터 캄보디아 땅에 들어와 복무하다 세상을 떠난 베트남 군인들의 주검을 본국으로 보내지 못해 캄보디아 정부에서 허락한 캄보디아 영토 내 베트남군인 묘지. 시간이 지나면서 묘지 주변과 아직 무덤들 들어서지 않은 공터까지 베트남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작은 마을을 이루었다. 세상을 떠났건, 세상에 남아있건 베트남 영혼의 거주 지역이 되었다.

매해 '쁘람삐 마까라'에 찾아오는 얼굴, 티양.

그래. 쁘람삐 마까라였다. 잊고 있다가도 이날이 되면 빚쟁이처럼 찾아오는 얼굴이 있다. 티양. 2007년 사제로 다시 캄보디아에 파견돼 대학에서 크마애 문학 공부를 할 때, 나는 주말 사도직으로 선배 신부가 맡아 하던 가톨릭교회 학생센터 일을 도와주었다. 선배 신부는 센터의 대학생들이 캄보디아 정치, 문화에 관심을 두고, 생각하고, 의견을 나누는 습관을 익히게 하려고 한 달에 한번 학생 토론회를 열었다. 선배 신부가 미리 토론 주제를 정해주면 70여 명의 학생들 중 매달 순번을 정해, 세 명은 찬성 주장을, 다른 세 명은 반대 주장을 준비해 발표했다. 각각 3분씩 발표했고 여섯 명의 대표 발표가 끝나면 다른 일반 학생들도 몇 명씩 앞에 나아가 개인 주장을 하곤 했다. 그리고는 찬반 주장 중 어느 쪽이 더 설득력이 있었는지 전체 투표로 정했다. 늦은 저녁 시간이었지만 나는 크마애 대학생들의 정치의식 수준이 궁금해 가끔 참석했고, 관심 있는 주제면 일반 발표자로 참가하기도 했다.

2008년 1월이었던가. 그 달의 토론 주제는 '쁘람삐 마까라는 종속인가 해방인가?'였다. 쁘람삐 마까라가 베트남에 의한 새로운 종속이라는 주장 발표가 다 끝나고 강제 이주, 노역, 학살을 자행한 '붉은 크마애' 공산 정권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주장이 이어졌다. 그때 티양을 보았다. 티양은 스스로 해방이라 말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그저 순번에 정해진 대로 그 주장을 했을까? 부모가 베트남계였지만 캄보디아에서 태어나 줄곧 캄보디아에서 학교를 다녔던 티양은 스스로를 누구라 생각했을까? 토론 막바지에 이르러 종속이라는 주장이 이미 학생들 사이에 지배적일 때, 해방을 말하는 티양의 목소리에는 여린 떨림이 묻어났다. 차가운 정치 논리 너머 그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으나 역부족인듯 바동거렸다. 그 짧은 3분 발표가 채 끝나기도 전에 애원에 가까운 목소리는 결국 눈물로 변했다.

나는 토론회가 끝나고 흩어져 돌아가는 학생들 안에서 티양을 찾아내 등을 토닥이며 “네 마음 알아. 미안해”라고 말했다. 티양은 내 얼굴을 멀거니 쳐다보더니 등을 돌려 다른 크마애 여학생들 틈에 섞여 사라졌다. “너와는 아무 상관없어, 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라고 말하는 듯했던 그 얼굴.

캄보디아에서의 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 강의.
교조주의를 너머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적응'해 나가야

마침내 일흔 중반의 노(老)사제 퐁쇼 신부가 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의 크마애 번역본을 들고 단상에 올라왔다. 날카롭고 힘찬 목소리로 그러나 또박또박 쉬운 말로 공의회 문헌의 교회 정신을 신자들에게 설명했다. 50년이 지났건만 지금 여기 우리에겐 여전히 새롭다. 그는 지난 50년을 캄보디아 근대사 소용돌이 속에서 신자들과 함께 했다. 몸소 체험한 근대사와 그에 대한 가톨릭 선교사로서의 성찰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0년>이라는 책을 통해 '붉은 크마애' 공산 정권시기를 서술했고, 또 <논 위의 성전>이라는 캄보디아 교회사를 써냈으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을 크마애로 번역하기에 가장 적합한 사제일게다. 지난 몇 년간 사제단 회의나 연피정에서 캄보디아 가톨릭 교회의 임무를 쩌렁쩌렁 외치던 모습과, 매년 쉬지 않고 하는 캄보디아 역사 세미나 때 느꼈던 퐁쇼 신부의 크마애에 대한 깊은 애정을 더듬고 있을 때, 옆에서 “우리 할아버지 신부님은 새벽 세 시에 일어나서, 베트남 라면 하나 끓여 드시고는 줄창 번역하셨어.” 라고 친구 신부가 자랑삼아 말한다.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은 ‘적응’이다. 정치권력에 밀착하고 자기 보호적 교조주의를 내세웠던 옛 모습을 털어내고, 지금 여기의 시대정신과 새로운 인식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교회이다. 캄보디아 교회가 걸어 들어가야 할 지금 여기의 시대 정신. 19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90년의 프랑스 식민정치가 끝나고 2차 대전과 더불어 일본의 손에 쥐여졌다가 다른 여느 약소국가들처럼 50년대에 간신히 독립을 한 캄보디아. 독립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왕과 공산세력과 미국이 서로 정치적 주도권을 잡기 위해 서로 이리 저리 손을 잡았다가 다음날 그 손으로 다시 총부리를 들이대곤 했던 땅. 그 죽음의 물결 뒤 1979년 1월 7일 베트남 공산정권이 붉은 크마애를 밀어내고 세운 ‘깜뿌찌어 인민공화국’의 10년간의 식민통치 동안 크마애와 베트남 사람들이 서로 이리 저리 떠밀려 뒤엉킨 채 살아남은 땅. ‘깜뿌찌어 인민공화국’에서 외무장관을 했던 훈센은 새로 들어선 캄보디아 정부에서 수상이 되어 지금까지 집권하고 있고,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새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캄보디아 가톨릭 교회는 '크마애화'를 추진해 크마애 전례를 공식화 했다. 최근 베트남 정부는 2014년 이후로 캄보디아에서 태어난 베트남계 아이들에게 베트남 국적을 허락하지 않을 거라 발표했다. 물론 캄보디아 정부도 그 베트남계 아이들에게 쉽사리 캄보디아 국적을 내어주지 않을 것이다.

교회 혁명의 메시지가 로마에서 프놈뻰까지 오는데 50년이 걸렸지만 이천 년의 교회 역사 안에서 50년은 그리 긴 기다림은 아니다. 사사키 아타루의 말처럼, '쓰고 읽으니 이제 되돌릴 수 없는 혁명의 물결이 시작된' 셈이다. 진정한 해방은 정치 권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로 인해 피폐해진 사람들 속에서 그들과 참된 혁명을 실천할 때 시작된다. 그들이 크마애건, 베트남계 사람들이건.

김태진 신부 (예수회, 캄보디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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