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7일 (사순 제1주일) 루카 4, 1-13

오늘은 사순 시기의 첫 주일입니다. 사순 시기는 부활 대축일 전 40일의 기간을 말합니다. 초기 교회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부활축일을 앞두고, 사흘 동안 단식하고 기도하면서 어려운 이웃에게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하고, 부활하신 그분의 생명이 그들 안에 살아있게 한다고 믿었습니다. 4세기 초에 로마제국으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얻으면서 이 사흘은 40일로 발전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40일 동안 단식하며 악마로부터 유혹 받으신 이야기였습니다. 유혹의 무대를 ‘광야’, ‘높은 곳’,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 등으로 바꾸면서 이야기는 전개됩니다. 이 이야기는 실제 일어난 일을 녹화하여 전하듯이, 사실 그대로를 우리에게 보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면서 예수님이 평소에 겪었던 유혹을 세 폭의 그림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하느님으로부터 얻고자 하는 것은 빵으로 표현된 재물이고, 권세와 영광이며, 또한 기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실제로 사람들에게 준 것은 하느님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악마는 사람들이 원하고 탐하는 것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라고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성서가 유혹이라고 말할 때는 인간이 하느님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 욕구만을 충족시키려는 충동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을 앞두고 게쎄마니에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시오.”(마르 14,38).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이 임박하였을 때, “이 잔을 가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시지 말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도 유혹에 빠지지 않고, 그분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었습니다.

오늘 유혹 이야기의 첫 무대는 광야입니다. 악마는 허기진 예수님에게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으로부터 기대하는 것은 먹고 살기 위한 재물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성서 신명기 한 구절을 인용하여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는다.’ 그 신명기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지 못하고 야훼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씀을 따라 산다.”(8,3). 예수님은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길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지 않았고, 하느님의 말씀 따라 살 것을 가르쳤다는 말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으로부터 재물을 얻어내는 데에 있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여 하느님의 일이 우리 안에 살아 있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 유혹 이야기의 두 번째 무대는 높은 곳입니다. 거기서 세상의 부귀영화를 보여주며 악마는 말합니다. ‘내가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오.’ 예수님은 신명기(6,13)를 또 인용하여 답하십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인간은 권세와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비굴하게 행동합니다. 높은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그 사람이 기뻐할 말을 찾아서 합니다.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자기 소신도 접고, 권력자의 시녀 노릇을 합니다. 정치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종교계에서도 우리가 흔히 보는 현상입니다. 권력을 가진 자가 함량미달이라도 좋고, 악마라도 좋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악마가 예수님에게 권하는 것은 하느님을 버리고, 권력과 영광을 줄 수 있는 자 앞에 엎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은 부귀와 영화를 얻기 위해 아무에게나 엎드려 절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자기 삶의 기준입니다.

이야기의 세 번째 무대는 성전 꼭대기입니다. 악마는 예수님에게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기적을 행하라고 권합니다. 예수님은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신명기(6,16)의 말씀을 또 인용하여 거절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신앙인인 것은 예수님 안에 초능력을 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병자를 고쳐주며, 마귀를 쫓는 기적을 행하였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적은 우리 눈에 놀라운 일을 의미하지 않고, 하느님이 하시는 은혜로운 일을 뜻합니다. 그런 기적 이야기들 안에 우리가 알아들어야 하는 것은 ‘열려라 참깨’가 아니라, 사람을 고치고 살리시는 하느님의 일입니다. 그런 이야기들 안에 하느님의 자비와 은혜로우심을 알아듣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으로부터 우리가 얻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말씀이지, 재물이나 권세와 영광, 그리고 기적하는 초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런 것을 탐하지만, 하느님은 인간의 그런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민원을 해결해주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특정 인물을 편애하고, 그에게 특별한 혜택을 주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특혜를 받아 보겠다고 몸부림치는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한 사람 잘 되겠다는 유혹에 빠진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자비와 사랑이 배여 있는 따뜻한 생명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부모와 가족들의 따뜻한 영접을 받으면서 세상에 태어납니다. 재물도, 권세도, 초능력도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의 온기(溫氣)를 전달하지 못하면, 인간 사이에 차별과 불화와 냉혹함만 발생시킵니다. 유대인들의 율법도, 그들이 하느님의 자비를 잊어버리자, 인간차별의 냉혹한 수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십자가는 인류역사가 하느님의 자비와 은혜로움을 외면하고 무자비를 택하였다는 사실을 알리는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와 은혜로움을 살려내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신앙인은 하느님의 자비와 은혜로움을 실천하며 살려고 노력합니다. 자기 소원을 성취하겠다고 열심히 기도하고, 권력과 영광을 얻어 보겠다고 아무에게나 엎드려 경배하면서 하느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인은 초능력을 찾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이 하신 일 안에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알아보고, 자기도 같은 실천으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자기 주변에 살아있게 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의 자녀로 사는 길입니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1964년 파리에서 서품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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