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우의 그림 에세이]

 
설날을 지냈다.
설날이라 해도 그 흥청임이 예전보다 훨씬 덜하다.
명절이면 서울역광장에서 밤을 새워 기다려 귀성열차표를 예매하고
기를 쓰고 고향에 달려가던 시절,
맛난 음식과 일년에 두어 번 얻어입는 때때옷
괴춤에서 오래 걸려 꺼내주시던 어른들의 새뱃돈에
전 날 설레어 늦도록 잠을 설치던 어린 시절도 있었다.
그때 명절은 길고도 곤고한 일상 끝에 얻는 피안 같은 환희의 축일

음식도 옷도 지천으로 남아 버려지는 시대.
고향이라야 아무리 먼 국토 끝자락도 자동차로 몇 시간이면 갈 수 있고,
발달한 통신수단으로 언제든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시대.
바쁘다는 이유로 명절 전 날 밤에 와서 차례 후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객지의 자식들.
노쇠한 부모님은 어쩌면 우롱 당한 기분일지도 모른다.
우애와 화목의 매개가 현찰로 대체되는 경박한 즉물성의 시대,
왠지 명절이 습관과 의무처럼 치러지고,
겨우 명맥만 유지되고 있는 무형문화제 같은 느낌이다.
그나마 이런 명절이라도 없으면
능률과 실질만이 만능인 시대에 연대와 교류는 낭비로 치부되고
맥락도 없이 파편화된 개인들만이 좀비처럼 유영하는 사회가 될까?
상상조차 하기 싫은 종말적 세계다.

가파른 속도로 변화하는 시대
살기 좋은 시대라지만...과연 지금이 그때보다 살기 좋아졌을까?
삶의 질이 더 나아졌을까?

혜화동 성당, 난간도 없는 몇 평 남짓한 종탑 위의 두 여인
1800여일 시위 끝에 마지막 수단으로 올라갔다는데...
엄동 언바람에 얼마나 막막하고 추울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김진숙을 내려오게 한 것처럼
다시 연대의 축제를 벌여야 하는 게 아닌가?
종탑 아래에서 걸판지게 한바탕 놀아야 하는 거 아닌가?
손나팔로 외치는 소리에
여인들이 까르르 웃음보를 터트릴지도 몰라.


우리가 여기 있다고
우리가 여기서 눈동자처럼 당신들을 지키고 있다고
곧 봄은 오고
종탑 위든 아래든 '지금여기'에서는 어쩌면 삶이 다 축제일지도 모른다고...

 
윤병우(화가). 전공은 국문학이지만 20여년 동안 그림을 그려왔다 .
4대강답사를 처음으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탈핵,송전탑, 비정규직,정신대할머니 등 사회적인 이슈가 있는 현장을 다니며 느낀 것과 살아가면서 떠오르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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