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상효 신부 ⓒ정현진 기자
혹시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사느라
잘 보이지 않을까 싶어 말씀드립니다.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매일 드나드는 여러분의 집 문간에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남편이고 누군가의 아버지이며 누군가의 아들인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여러분과 같은 땅에서 난 소출을 먹으며
같은 공기를 호흡하며 같은 하늘을 이고 있는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소박한 꿈을 꾸며 아이들의 웃음에서 삶의 고단함을 잊고
하루하루의 노동을 기쁘게 감수하기를 원하는
그저 사람인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큰 욕심을 내지도 않았으며, 큰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으며,
그저 하루하루의 소박한 기쁨으로 만족하며 살고 있는
그저 사람인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혹시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사느라
잘 보지 못하고 있을까 싶어 다시 말씀드립니다.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매일 드나드는 여러분의 집 문간에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부자들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라도 배를 채우려했으나
그것마저도 빼앗기고
이제는 개들까지 와서 종기를 핥아대는
고통의 나락에서 몸서리치고 있는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강성노조 때문에 기업하기 어렵다고들 합니다.
인건비 때문에 채산성이 떨어진다고들 합니다.
노사분규 때문에 투자가 들어오지 않는다고도 합니다.
시신이 현장에 들어와 있어서 수주계약이 어렵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잘 압니다.
우리 노동자들이 하는 요구란 그저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정도라는 것을 말입니다.
본인의 배를 채우고, 주주의 배를 채우고, 투자자의 입을 행복하게 하고, 여
기저기 힘 있는 사람들의 입을 윤택하게 만든 다음에야 겨우 돌아올 그 부스러기,
바로 그 정도가 여기 이 사람들의 요구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다 압니다.

그 부스러기라도 안정적으로 얻을 수 있기를,
그 굴욕의 대우라도 미래를 계획할 수 있을 만큼 안정적이길 바라는 것,

그래서 스스로 사람임을 그저 느낄 수 있을 만큼의 행복을 걱정 없이 누리는 것,
그것이 이 사람들의 소박한 요구입니다.
그러나 그 부스러기조차도 이제는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아니 부스러기를 빼앗는 것도 모자라
이제까지 우리 집 문간을 더럽혀서 손해를 입혔으니 손해를 배상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개들까지 와서 종기를 핥아댑니다.
결코 아물지 않을 이 상처를 개들이 핥아댑니다.
귀족 노조라고 합니다. 폭도라고도 합니다.
경영정상화의 걸림돌이라고도 합니다.
외부세력이라고도 합니다. 범법자라고도 합니다.
그렇게 상처를 핥아 댑니다.

때로는 그럴듯한 제복을 입고 와서, 때로는 하이바를 쓰고 와서,
때로는 언론이라는 고상한 잣대를 들고 와서 상처를 핥아 댑니다.
그렇습니다. 이들이 개가 아니듯이 여기 모인 사람들도 제거해야할 종기가 아닙니다.

그들이 스스로 개라고 여기지 않듯이
여기 모여와 함께 아파하는 사람들 모두도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도려내야할 종기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그저 사람인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집 문간에 라자로라는 극한의 한 인간을 두고
매일 그 문간을 드나들었을 그 부자는 보지 못합니다.
끝내 보지 못합니다. 사람을 보지 못합니다.

경영은 눈에 보이나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돈은 눈에 보이나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익은 눈에 보이나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혹시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사느라
잘 보지 못하고 있을까 싶어 다시 말씀드립니다.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가치로도 바꿀 수 없고, 심지어 온 인류를 위한 공익일지라도
그것을 위해 무시해 버릴 수 없는 한 사람의 가치가 여기 있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걸고 지켜내려 하셨던 바로
그 사람의 가치가 여기 있습니다.
여기를 보셔야 합니다.
여기를 꼭 보셔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이 부자의 죄는 무엇일까요?
그를 불타는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당하게 만들었던 그의 죄는 무엇일까요?
딱히 사회적 범죄를 저지른 성서적 기록도 없고,
부자로서 사회적 명망도 높았을 그를 지옥 불에서 울부짖게 만들었던
그의 죄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가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집 문간에 그 비참한 한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볼 수 있는 조건도 있었고, 능력도 있었으며,
기회도 많았던 그가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부자의 죄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 부자의 죄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이런 죄가 지속되거나 반복되지 않기를 빌며 간곡히 말씀드립니다.
능력과 권한과 자신이 소유한 재물의 크기만큼 사람에 대한 책임이 있음을,
내가 가진 능력과 권한과 소유한 자본의 크기만큼 져야할 죄의 크기도 크다는 것을,
그 부자가 가진 것이 원래 자기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 부자의 죄를 드러낼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같이 외쳐봅시다.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김상효 신부(부산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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