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식의 삶과 노래]세상안에서 세상과 다르게

 

 

2005년 3월 어느 날. 새로운 봄이 어김없이 돌아오고 있었다. 오랜만에 큰맘 먹고 방 정리를 하다가 15년 전 어느 날 명동거리공연 실황이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발견하게 되었다. 음향기에 넣고 들어보면서 잊을 수 없는 그날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떠올랐다.

1990년 12월 5일. 아직 겨울은 이른데도 그날 명동 들머리는 바람 때문에 매섭게 추웠다. 기타를 치는 손가락이 얼얼해진 것은 벌써 오래전 일이고, 입안이 얼어서 혀와 입술이 잘 움직이지 않으니 노래가 제대로 불러지지 않았다. 추운 곳에 서서 계속 노래를 하다보면 열려있는 입을 통해 공기의 대류현상이 일어나 체온이 더 떨어지는지 가만히 서있는 것보다 훨씬 춥게 느껴진다. 머리가 띵하여 음정조절도 잘 안되고, 입이 얼어 있으니 내가 들어도 목소리가 어눌하게 들린다. 노래하는 곳도 듣는 곳도 길바닥이기는 마찬가지여서 몹시 추울 텐데도, 긴 시간을 둘러서서 노래를 듣고 있는 고마운 사람들이 늘 있었다. 그렇기에 몸이 전체적으로 얼어서 굳어가고, 허기져서 배에 힘이 빠져가는 것도 잊고 노래를 했던 기억이 아직까지 선명하다.

몇 곡을 부르고 나서 다음 곡을 부르기 위해 악보를 뒤적이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서 말을 건넨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제가 LA에 있는 미주 문화방송 지사장인데요. 노래가 너무 좋아서 휴대용 녹음기로 녹음을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미국에 돌아가면 종종 생각날 것 같아서요.”
“네. 그렇게 하시지요. 녹음할 만큼 잘하는 노래가 아니라서 부끄럽긴 하지만 혼자 들으실 거라면 괜찮겠지요.”

그분은 내게 손바닥만한 크기의 Walkman Analog 녹음기를 보여 주었다. 그 시절 기자들이 인터뷰할 때 자주 사용하던 것이었다. 녹음을 한다고 하여 노래를 더 잘 부를 재주도 없었지만, 얼마나 추운지 녹음한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정신없이 노래만 불렀고, 그날따라 교대가 늦어지고 있었다. 보통 때는 2~3시간씩 교대를 해도 괜찮지만 추운 날은 30분을 버티기도 힘들다. 노래하기도 힘들고 기타를 치는 일도 힘들지만 무엇보다 발이 시리다 못해 얼어온다. 그럴 때면 마치 노래에 장단을 맞추듯이 이 발 저 발로 무게중심을 옮겨가며 교대로 한 쪽 발로만 서 있게 된다. 새들이 그러하듯이.

안간힘을 다해 1시간 반쯤을 버티고 있을 때, 그분이 다시 다가왔다.

“저~. 너무 추워보여서 그러는데 이 외투 입으실래요? 날씨가 갑자기 너무 추워지는 바람에 도저히 견딜 수가 없더라구요. 그래서 낮에 이태원에 가서 52만원 하는 걸 50만원에 샀어요. 겨우내 노래하시려면 꼭 필요하실 것 같은데요. 괜찮으시다면 아예 드리고 싶은데요.”

“그러면 선생님이 춥잖아요.”
“저는 이제 가야하는데 택시를 타면 춥지 않을 거구요. 계속 날씨가 추우면 내일 하나 더 사면 되니 제 걱정은 마시구요.”

사양하고 싶지 않았다. 진정으로 주고 싶어 하는 간절한 마음이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 순간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래서 겨울에 길에서 노래할 때마다 고맙게 잘 입겠다고 인사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명동에서 박준 형제와 거위털외투를 입고
그 후로 그 옷은 겨울철 거리공연을 할 때 마다 입는 방한복이 되었다. 당시 일반인들에게 겨울철 최상의 방한외투로 각광받았던 오리털외투보다 훨씬 가볍고 따뜻한 거위털외투. 이름 하여 구스다운 쟈켓(Goose Down Jacket). 아무리 추운 날도 이 외투를 입고 서면 추위를 잊을 수 있었다. 아름다운 사랑을 입고 서서 부르는 노래 또한 늘 사랑이 되었다.

그렇게 그날 녹음된 1시간 분량의 거리공연 실황 노래 테이프가 그분과 함께 동행 했었던 지인을 통하여 내게 전해졌고, 다시 들어볼 겨를도 없이 15년이 흐른 것이다. 자동차 클랙션 소리, 지나가는 사람들 소리, 관중들의 얘기와 박수소리, 오토바이 지나가는 소리, 교통정리 하는 호루라기 소리가 고스란히 담겨있어 그날의 현장감을 그대로 전달해 주는 데 조금도 손색이 없다. 그러나 정작 너무 추워서 노래는 잘 못 부른 이 음반을 세상으로 내 보내고 싶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세상으로 내보내는 이유는, 이 음반에는 노래보다 훨씬 아름다운 사랑이 스며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CD로 복각하는 작업을 하면서 슬픈 노래들 안에 간직된 아름다운 그날이 그리워졌다. 그리고 그 외투를 입고 노래할 때 마다 떠올랐던 생각을 다시 반추했다. 외투를 입고 노래하고 있는 나는 아직까지 따뜻한데, 갑자기 날씨가 너무 추워서 샀다는 외투를 선물하고 돌아가는 그분의 그날 밤길은 많이 추웠을까? 


김정식/가수 겸 작곡가로 생활성가의 개척자이며, 파리국립음악원에서 그레고리안과 지휘법을 공부하였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기위한 자선음악회와 환경보전과 인권회복을 위한 사회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으며 어린이들을 위한 노래와 예술가요 및 연주곡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만들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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