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의 역사의 창, 교회 14]


▲ 흥선대원군

왕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 나라를 세운 왕이 아니라면 왕의 아버지는 또 다른 왕이었다. 그러나 뒤를 이을 아들을 가지지 못한 왕의 경우에는 가까운 종친이 왕에게 입양되는 형식을 통해서 그 후계자로 결정된다. 이때 새로 즉위하게 된 국왕에게는 양부인 국왕과 함께 국왕을 직접 낳은 생부가 있게 된다. 이 경우 왕실이나 조정에서는 국왕의 생부에 대한 적절한 예우가 필요했다. 그래서 국왕의 생부에게는 대원군이라는 칭호를 주고 특별히 우대하고자 했다. 대원군은 실제로 행정부의 영의정과 대등한 정1품의 직위에 해당되는 보통명사였다. 그런데 조선의 역사에서는 4명의 대원군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 4명의 대원군 가운데 3명은 그 아들이 국왕에 즉위할 당시 이미 세상을 떠났으므로 대원군이란 칭호를 추존(追尊)했다. 그러나 조선 제26대 국왕인 고종의 생부는 생전에 대원군으로 봉해졌다. 그가 곧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다. 즉, 여러 대원군들 가운데 살아서 역사에 개입했던 인물은 흥선대원군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대원군이란 칭호는 그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처럼 사용되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등장과 천주교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둘째 아들이 12세의 미성년으로 국왕의 위에 오르자 섭정이 되어 국가의 모든 정책의 결정권을 부여받았다. 국왕 고종이 즉위한 때 조선왕조는 안팎으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국내의 사정을 보면, 조선왕조는 거듭된 실정과 농민에 대한 수탈로 인해 전국적 규모의 농민반란에 직면해 있었다. 한편, 대외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러시아, 영국, 미국 등 서양 여러 나라들은 조선이 문호를 개방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대원군은 이러한 내우외환을 극복하고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해야 할 책임을 통감했다.

그는 권력을 장악한 직후 과감한 내정 개혁을 통해서 왕권을 안정시키는 데에 기여했다. 그의 집권으로 벌열들이 장악하고 있던 통치권은 왕실로 돌아갔다. 세도귀족들의 발호를 막을 수 있었다. 국가재정은 안정되었고, 도처에서 일어나던 농민저항운동도 수그러들었다. 이와 같은 개혁정치는 긍정적 측면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그것은 전근대적 통치의 과정에서 진행된 개혁이었을 뿐이다. 그는 사상에 대한 철저한 통제를 시도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그의 개혁은 결코 조선을 근대사회로 전환시킨 개혁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는 권좌에 오르기 전에 민간에서 생활하면서 천주교가 성행하던 당시 사회의 동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천주학장이들은 세 가지를 잘 한다. 첫 번째는 언문이요, 두 번째는 죽은 사람을 염하는 일이며, 세 번째로는 밀초제작이다”라는 취지의 언급을 남겼다고 구전되고 있다. 이는 그가 천주교 신자들의 일상생활까지도 꿰뚫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일화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는 유학의 한 갈래인 성리학의 가르침에 기초를 두어야 왕권의 안정이 보장되리라 판단했다. 그 당연한 결과로 당시 집권층에게서 강하게 배척받으며 사회문제로 제기되었던 천주교 신앙에 대한 탄압을 그는 결정했다.

탄압의 대상이었던 조선 천주교회의 선교사들과 신자들은 대원군의 포악성을 강조하여 말하기도 한다. 사실, 대원군의 천주교신자 학살은 당대 사회를 전율시키기에 충분했다. 당시 떠돌던 이야기로는 대원군이 ‘살만인’(殺萬人) 즉, “만 명을 죽여야 권좌를 유지할 수 있다”는 음양술(陰陽術)을 믿어서 천주교신자들을 그렇게 죽였다고도 했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만인을 죽인 역사’(殺萬人史)의 일부라는 인식도 있었다.

한편 대원군의 집권 당시에는 서원의 횡포가 대단했다. 서원에 적을 두고 글을 읽는 양반들에게는 조세의 일종인 군포(軍布)를 면제해주는 특전이 있었다. 당시 서원은 일반 평민들에게 일정한 기여를 받고 서원에 등록시켜 그들이 군포세를 국가에 내는 대신 조금 감액된 금액을 받아 챙김으로써 많은 이득을 누렸다. 이 때문에 국가의 재정수입은 크게 축소되었고 농민에 대한 착취가 강화되었다. 그래서 국가의 재정을 확보하고 농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서원을 철폐해야 했다. 그러나 서원은 조선왕조를 지탱하던 성리학을 보존하고 재생산해내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서원을 혁파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사상의 순수성을 먼저 보여주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서원 철폐에 앞서서 당시 사상계의 주요 문제였던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단행했다.

박해 이후의 대원군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은 철종이 즉위한 이후 활발히 선교되고 있던 천주교회를 뿌리 채 뒤흔들어 놓았다. 당시 사람들의 말로는 대원군이 십년을 기한으로 하여 천주교의 싹을 말려버리려 했다고 한다. 1866년에 시작되어 3년여에 걸쳐서 계속된 대원군의 박해를 통해서 조선에서 선교하던 프랑스인 선교사 9명을 비롯해서 많은 신자들이 희생되었다. 이때에 희생된 신자들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1868년 9월에 벌써 박해에 희생된 사람이 2천 명이 넘었는데, 그 중에 5백 명이 바로 서울에서 죽었다. 1870년에 조선에서 공공연히 떠도는 풍문에 의하면 산에서 굶주림과 곤궁으로 죽은 모든 사람을 빼고도 희생된 사람의 수가 8천에 이르렀다 한다. 물론 이 숫자를 확인할 도리는 없다. 그러나 아무리 이 숫자들이 과장된 것이라 하더라도, 대원군이 그의 약속을 지켜 10년도 안 걸려서 천주교의 흔적을 지워버리기를 원하고 있음을 증명해 준다.”

대원군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천주교회는 결코 죽지 않았다. 박해는 천주교를 더욱 확산시키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정치권력도 10년을 가지 못했다. 그는 고종 임금이 직접 정치를 맡게 된 이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자신의 며느리 민비 일가와도 치열한 권력투쟁을 했지만 참패당했다. 개항이후 한때 그가 정권을 다시 장악하기도 했지만, 곧 밀어닥친 근대화의 과정에서 그가 설 자리는 더 이상 없었다. 그 후에도 그는 정치적 권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무진 애를 썼다. 심지어 그는 1895년 을미사변을 통해 민비의 제거에 개입했다가 철저히 실각하게 되었다. 민비가 시해된 을미사변 이후 그는 공덕동 자택에서 거의 유폐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때에도 권토중래를 기도하면서 외국인들과의 접촉을 그침 없이 시도하고 있었다. 그는 1897년 6월15일에는 서울주재 프랑스 공사였던 프랑시와 천주교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특별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해 여름 뮈텔이 이질에 걸려 고생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별도로 뮈텔에게 사람을 보내 병문안을 했고, 며칠 있다가는 당시 매우 귀중한 약재였던 청심환 세 알을 뮈텔에게 보내주기도 했다.

그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 민씨는 이미 1896년 10월에 뮈텔 주교로부터 ‘마리아’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받아 신자가 된 바 있다. 그렇지만 대원군 자신은 천주교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여전히 관심이 없었다. 돌이켜 보건대, 대원군은 30여 년 전인 1866년에 조선의 천주교회를 쑥대밭으로 만들고자 했고, 조선에 나와 있던 프랑스 선교사들을 학살했다. 학살된 사람 가운데는 천주교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도 있었다. 그로부터 30여년 후, 이제 그는 베느뇌 주교의 뒤를 이은 뮈텔 주교에게라도 기대어서 자신의 권력을 회복해 보려는 추루한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남은말

대원군은 천주교에 투신하던 민중의 마음을 결코 읽어낼 수 없었다. 대원군의 눈에 비친 천주교는, 그가 권좌에서 천주교를 박해하던 1866년에나 유폐생활을 강요당하면서도 뮈텔 주교에게 추파를 던지던 1897년에도, 여전히 서양세력의 일종이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정권을 장악했던 때 천주교를 서양세력의 앞잡이로 판단하고서 이를 배격하고 철저히 탄압했다. 그러나 을미사변 이후 자신의 힘이 극도로 소진되자 그는 천주교를 이용 가치가 있는 서양 세력으로 다시 파악하고 접근한 듯하다. 아마도 그의 삶이 실패하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는 그가 천주교를 일종의 정치 세력으로만 파악했던 데에서도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민중을 학살한 학살자로 그리고 국가의 근대적 개혁과 개방을 막은 인물로 계속 기억될 것이다.

/조광 고려대학교 교수, 사학과 2008-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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