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명희의 행복선언]

수입 안약 3만 5천 원, 신경정신과 약 45만 원, 그리고 고가의 간질약이 약 봉투 안에서 주인을 기다린다. 무료 진료소로서는 감히 구입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비싼 약이다. 그러나 이런 약 때문에 사흘이 멀다 하고 환자와 승강이를 벌이는 것이 진료소의 일과다. 대부분의 환자가 주거가 일정하지 않은 알코올 중독이라서 툭하면 약을 잃어버리고 다음날 다시 와서 약을 내놓으라고 막무가내로 떼를 쓴다. 문제는 이런 고가의 약인 경우다. 이럴 땐 나도 화가 나서 악다구니로 대든다. 무료 진료소의 단골 중의 단골인 그 청년과도 이런 이유로 무척 싸웠다.

 ⓒ문양효숙 기자
스물 다섯 살의 청년은 얼굴이 희고 고왔다. 순진하게 큰 눈과 발그레한 뺨이 노숙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여느 집 귀한 아들티가 나서 진료소 직원들은 그를 귀공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약을 탈 때마다 자꾸 감추기만 하는 오른쪽 옷소매 안에는 있어야 할 팔 하나가 보이지 않고 소매만 축 늘어져 있었다.

그의 운명이 바뀐 것은 불과 몇 분 사이였다. 휴가철을 맞아 세 식구가 고향인 부산에서 경주로 여행을 가는 길이었다. 아버지가 운전했다. 사고를 예감했을까?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뒷좌석에 앉아있던 어머니가 조수석의 아들에게 자리를 바꾸자고 했다. 휴게소를 출발한 지 30분, 그의 가족이 탄 승용차는 반대쪽에서 돌진해온 대형트럭과 충돌했다. 중환자실에서 며칠을 보냈다. 뇌수술을 받고 일주일 만에 깨어났는데 부모님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오른팔도, 기억도 잃었다. 그리고 어쩌다 서울역까지 오게 되었다.

그는 한 노숙인의 등에 업혀 무료 진료소에 왔다. 간질발작으로 쪽방 골목에 쓰러져 있는 그를 데려온 것이다. 뇌수술 후유증으로 시시각각 간질에 시달렸고 녹내장으로 시력까지 감퇴하고 있었다. 언어능력까지 잃고 더듬더듬 의사를 표현하는 상태였다. 생각도 감정도 퇴행해서 지적 장애인처럼 되어 버렸다. 노숙인 쉼터에 머물면서 불안증, 불면증, 잦은 간질 발작으로 일상생활이 불가능했다. 급식소에서 주는 밥조차 혼자 힘으로 챙겨 먹지 못했다. 간질약을 안 먹으면 하루에도 몇 번씩 쓰러져서 발작에 시달리다 초주검이 되어 업혀오곤 한다.

할 일도, 갈 데도 없는 청년은 반경 1킬로미터의 쪽방 지역을 벗어난 적이 없다. 무료 진료소는 그가 마음 놓고 드나드는 유일한 놀이터이자 나들이 공간이다. 대신 본능만 남은 그의 짜증, 신경질, 변덕, 화풀이를 받아주는 쓰레기통의 역할도 고스란히 진료소의 몫이다. 이곳은 그에게 가족이고 부모다. 아침에는 코감기, 점심시간이 지나면 기침약, 저녁에는 몸이 쑤신다고 수시로 협박해서 약을 받아가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무료진료소에서 가장 비싼 약을 먹는 것도 그다. 매일 그가 가져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양한 종류의 약은 불안과 무료함, 절망에서 그를 위로하고 달래주는 종합선물세트다.

요즘 진료소에 오기만 하면 잔뜩 찌푸린 얼굴로 이것저것 시비를 걸고 짜증을 부리던 그에게서 이상한 낌새가 포착되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미소였다. 말투도 변했다. “안녕하세요!” 어눌한 말투로 인사까지 한다. 차림새도 심상찮다. 땟국이 자르르 흐르는 셔츠와 꾀죄죄한 바지를 벗고 상큼한 난방에다 날씬한 청바지, 반짝이는 하얀 운동화까지 패셔니스트로 변신한 그의 모습이 충격이었다. 신기하고 궁금했다.

역시 비밀이 숨어 있었다. 동갑내기이자 상큼 발랄한 김보리 약사의 등장이 그를 바꿔 놨다. 보리 약사가 진료소의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그의 눈에서 레이저 광선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물증도 있다. 초코파이다. 보리 약사의 봉사 시간은 매주 수요일 6시. 그런데 4시만 되면 그가 투약 창구 앞에서 대기 중이다. 보리 약사를 기다린다. 친절한 보리약사는 투약창구에서 그가 먹는 간질 약, 불면증약, 우울증약, 감기약까지 약에 대한 설명부터 먹는 법까지 자상하게 이야기해준다. 약 봉투를 안고 추스르느라 쩔쩔매는 그의 오른팔을 대신해서 그녀는 살뜰하게 챙겨준다. 이때 귀까지 빨개져서 어쩔 줄 몰라 해하면서 그는 윗주머니에 고이 넣어둔 초코파이를 꺼내 보리약사에게 건네준다. 오직 보리약사에게만. 어쩌다 보리 약사가 못 오는 날이면 그는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풀이 확 죽어서 금새 티가 났다. “왜.안.와.요.” 아쉬움과 실망을 어눌한 발음에 잔뜩 실은 채 현관 쪽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의 짧은 설렘도 막을 내렸다. 지난겨울, 그가 119구급대에 실려 지방의 한 정신요양원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녹내장으로 인한 실명과 간질 때문이었다. 그의 불안한 눈 빛, 경련으로 바들바들 떨던 가느다란 왼쪽 손가락들, 보리약사에게 품었던 짧고 작은 설렘, 희망의 알맹이들만이 남아 그의 흔적을 느끼게 해준다.

경제학자 폴라니는 진정한 진리는 중력을 뿌리치고 새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땅으로 잡아끄는 악착같은 힘에 저항하며 한 뼘이라도 더 지구에서 멀어지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장대높이뛰기 선수, 스키점프 선수, 발레리나 등.

그 청년에게도 잠시 중력과 맞설 기회가 왔었다. 보리 약사와의 만남은 그가 세상의 중력을 딛고 점프해서 공중에 머무는 자유의 시간이었다. 이렇게 아주 잠깐 아주 조금 땅에서 멀어지고 하늘에 가까워지려 했던 그의 모습은 외로움과 절망 속에서도 중력을 거역하려는 인간의 숭고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비록 실패였다 해도 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패배방식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래서 약속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약을 잃어버리고 온다 해도 불평하지 않으리라. 이분들이 부디 중력과 싸울 수 있도록, 스스로 되뇌리라. “있을 때 잘해!

심명희 (마리아. 약사. 선우경식기념자활터 봉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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