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파노라마-9]

나일 강 동쪽, 아크로폴리스(산 자의 도시)지역을 대표하는 건축물인 카르나크와 룩소르 신전을 이어주는 스핑크스의 길을 몇 차례 반복해서 걷다가, 선착장에서 소형보트를 타고 룩소르 서안으로 건너갔다. 먼저, 역대 파라오들이 잠들어 있는 무덤과 36개의 장제전이 남아있는 네크로폴리스(죽은 자들의 도시)지역을 대표하는 유적지인 ‘왕들의 계곡(Valley of the Kings)’을 향해 걸어가 보았다.

고대 이집트어로 타-세케아아트(Ta-sekheaat, 서쪽의 아름다운 계곡)라고 불렀던 이 골짜기에는, 영생(永生)을 믿었던 신왕국 시대의 왕과 왕비를 비롯한 귀족들의 암굴무덤 약 600기가 분포되어 있다. 꼭대기가 천연 피라미드처럼 생긴 높이 450m의 알-쿠른 산(Mt. Al-Qurn)계곡의 가파른 바위절벽을 뚫고 교묘하게 조성해놓은 고대의 무덤들은,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서인지 외관상으로는 지극히 평범하게 조성되어 있었다.

사진촬영이 엄격히 금지된 왕들의 계곡에서, 부활을 꿈꾸던 고대 파라오들의 염원이 생생하게 묘사된 람세스 4세(Ramses IV, 1154~1148년 재위)의 무덤 속 천정 벽화를 눈여겨 살펴보다가, ‘하셉수트 여왕의 장제전((Mortuary Temple of Hatshepsut)’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장제전은 무덤의 부속건물로서, 장례식과 죽은 파라오가 내세에서 부활하기를 기원하는 의식을 동시에 집전하던 곳이다.

▲하셉수트 여왕의 장제전. ⓒ수해

데이르 엘-바하리(Deir El-Bahari)의 깎아지른 듯한 단애의 절벽이 병풍처럼 빙 둘러쳐진 골짜기 깊숙한 곳에 세워진 하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은, 멀리서 보기에도 위풍당당하기가 그지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무시로 비 오듯이 줄줄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낼 생각도 잊어버린 채, 무엇엔가 홀린 듯이 새파란 하늘과 장밋빛 절벽이 기묘한 조화를 이루며 손짓하는 고대의 신전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티켓을 구해 들고 안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머리 위에서는 나일 강 서안 유적지를 전체적으로 조망해 보려는 여행자들을 태운 각양각색의 열기구가 계속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매표소에서 장제전 입구까지는 일정한 간격으로 미니 열차가 운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주변의 전체적인 지형을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조금 속도를 늦추면서 걸어가다가 보니, 어느덧 3층으로 건립된 육중한 테라스를 아름다운 대리석 기둥이 굳건하게 떠받치고 있는 장제전의 경사진 중앙통로에 당도하고 있었다.

구석구석 세계각지에서 몰려든 여행자들이 밀집해 있는 1층 테라스의 복도에 들어서자, 부활을 관장하는 오시리스 신의 형상을 한 하셉수트 여왕의 얼굴이 새겨진 22개의 기둥이 늠름하게 도열해 있는 회랑(回廊)이 나타났다. 복도의 벽에는 오벨리스크를 건립하는 모습과 여왕의 탄생 장면을 비롯하여 그녀의 위업을 담은 각종 벽화가 세밀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어지는 2층 테라스에는 15개의 둥근 기둥과 44개의 네모기둥으로 된 복도가 나타났다. 복도의 벽에는 1층과 마찬가지로,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거머쥔 권력계승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아몬 신의 축복을 받고 태어나는 여왕의 생애와 푼트((Punt)원정의 모습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오시리스 형상을 한 하셉수트 여왕의 석상과 2층 회랑의 벽화 ⓒ수해

전해지는 기록에 의하면, 하셉수트는 원래 여왕이 아니라 왕비였다. 투트모세 1세의 장녀이며 이복 오빠인 투트모세 2세의 왕비였던 하셉수트는, 투트모세 2세가 일찍 죽자 후궁 소생의 어린 의붓아들 투트모세 3세의 섭정(攝政)을 하다가, 스스로 파라오의 자리에 올랐다. 권력욕이 유난히 강했던 그녀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파라오가 된 자신의 과오를 합리화하기 위해, 이를 무마시켜줄 만한 수많은 건축물을 세웠으며, 광산의 확보와 교역확장을 위해 이집트 영토를 시나이 반도와 지금의 수단 지역으로 알려진 푼트까지 확장해 나갔다.

그러나, 어린 시절 하셉수트에 의해 궁정 한쪽에서 거의 유폐되다시피 하면서 외롭고 곤궁한 나날을 보냈던 어린 왕자 투트모세 3세가 장성하자, 스스로 턱수염까지 달고 천하를 호령했던 그녀의 전성기도 비극적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살아생전 자기 자신의 부활을 위해 혼신을 다해 장제전을 꾸며놓은 하셉수트 여왕과, 그녀의 부활을 방해하기 위해 여왕이 세워놓았던 각종 기념물을 파괴하고, 이집트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그녀의 이름을 영원히 삭제해버리고자 몸부림쳤던 투트모세 3세의 치기 어린 분노의 함성이 어디선가 계속 들려오고 있는 듯한 골짜기를 돌아 나와, 천천히 미적지근한 생수를 벌컥벌컥 마시면서 강변을 향해 걸어 나갔다.

온통 땀으로 얼룩져버려, 더 이상 유적지의 형체조차도 알아보기 힘든 낡은 지도를 펼쳐들고 옥수수가 무성하게 자라나는 강변의 밭두렁을 따라서 무턱대고 걸어 가다가 보니, 황량한 벌판 한가운데서, 느닷없이 불쑥 모습을 드러내는 두 기의 석상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 멤논의 거상. ⓒ수해

마치 벼락 맞고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서 굳어버린 표정을 한 듯한 이 우람한 석상은, 신왕국 제18왕조의 아멘호테프 3세(Amenhotep III, 1386~1349년 재위)가 그의 장제전 입구에 세워놓았던 조형물이다. 그런데 나일 강과 너무 가까운 장소에 지어놓은 아멘호테프 3세의 장제전은, 어느 해인가 극심한 홍수로 나일 강이 범람하면서, 전체가 파괴되는 비운을 겪어야만 했다. 그 때문에 무너진 석재파편들은 후대의 왕들이 다른 신전을 건립할 때 석재로 사용하느라고 어디론가 모두 옮겨가 버리고, 지금은 장제전의 정문을 지키던 두 기의 석상만 우두커니 남아있다.

아멘호테프 3세가 왕관을 쓰고 왕좌에 올라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것을 표현해 놓은 높이 23m의 이 거대한 조형물에는, 옛적부터 전해져 오는 신비한 이야기가 한 가지 있다. 로마 시대에 특별히 주목받는 관광지였던 이곳을 방문한 그리스인들은, 황량한 벌판 한가운데 서 있는 이 석상의 주인공이, 어쩐지 트로이 전쟁을 읊은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비극적인 영웅 ‘아가멤논(Agamemnon)’과 닮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기원전 27년 무렵 이 지역에 원인모를 큰 지진이 발생한 뒤로는, 아침 해가 뜰 무렵만 되면 어김없이 석상에서 우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울음소리가 듣는 사람들의 귀에는 마치 멤논이 그의 어머니 에오스(Eos, 새벽의 여신)를 그리워하며 우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리하여, 언제부턴가 아멘호테프 3세의 석상에는 그리스인들에 의하여 ‘멤논의 거상(The Colossi of Memnon)’이라는 조금 생뚱맞은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어느 모슬렘 마을의 저녁풍경. ⓒ수해

무수한 신화와 전설이 활발(活潑)하게 살아 숨 쉬는 나일 강 서쪽 강변에서, 다시 동쪽 지역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다가 보니, 역마차를 몰고 가던 어느 농부가 다가와서, 지금 룩소르 시내로부터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그의 친구 집을 방문하러 가는데, 나더러 동행을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틈틈이 날렵한 솜씨로 말채찍을 휘두르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이름 모를 농부의 역마차에 올라, 뉘엿뉘엿 땅거미가 내리는 비포장도로를 한참 동안 달려가다가 보니, 쪽빛 초승달이 걸린 모스크에서 *아잔이 은은히 울러 퍼지는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골목마다 옹기종기 모여 공기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함성과 집집마다 꾸란을 독경하는 어른들의 기도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기묘한 몽환(夢幻)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골목길을 돌고 돌아서, 한참만에야 겨우 당도한 모슬렘 농부의 친구네 집 풍경은, 그야말로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였다.

야자나무 우거진 담장 너머로, 야트막한 실개천이 휘돌아 흐르는 그 집 마당 한가운데서는 어린 당나귀가 한가로이 여물을 씹고 있었고, 처마 밑에서는 산전수전 다 겪고 달관한 표정을 한 그의 친구가 뻐끔뻐끔 물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맞은편에서는 통나무에 걸터앉은 그의 아내가 침침한 눈길로 꾸란을 펼쳐 들고 독경(讀經)을 하고 있었다.

행여 누가 몰래 속살을 들여다보기라도 할세라, 겨우 두 눈만 빼꼼이 내놓은 채 검디검은 차도르(Chador, 이슬람 여성들이 착용하는 머릿수건이 달린 망토 모양의 전통의상)로 전신을 온통 휘감아 두르고, 웅얼웅얼 목쉰 음성으로 독경을 하는 아낙네의 등 뒤로 눈이 부시도록 환한 저녁노을이 속절없이 화르르~무너져 내리는 그곳에서, 시나브로 아주 짧은 찰라의 순간이지만, 온갖 분별과 시비로 얼룩진 나의 모든 감각기관도 순정한 적멸(寂滅)의 세계 속으로 고스란히 함몰되어 가고 있었다.

* 아잔- 이슬람교에서 예배 시간을 알리기 위해 큰 소리로 외치는 일

 
 
수해 (기행문학가)
운문사 강원을 졸업하고, 오랫동안 세계 여러 나라의 명상사원과 문화유적지를 순례하다가, 동국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지은 책으로 시집《산 두고 가는 산》과 동아시아 기행 에세이《예정된 우연》이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