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의 역사의 창, 교회 12]

▲ 1894년 일본 신양당에서 발행한 '조선국귀현초상'
우리나라 역사에는 지워버리고 싶은 몇몇 장면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민비 시해사건이다. ‘을미사변’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건은 1895년 을미년 10월 8일 새벽 5시 30분부터 6시 30분 사이에 경복궁 안에 있는 건청궁 곤녕각에서 벌어졌다. 국모로 불리며 당시의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민비(閔妃) 명성황후를 일본 자객이 칼로 쳐서 죽여버렸다. 이 사건은 조선에 주재하던 일본 공사 미우라 코로(三浦梧樓)에 의해 저질러졌다.

미우라 공사는 사건 직후 경복궁에 와서 민비의 시신을 직접 확인했고, 증거 인멸을 위해 이를 당장 불태우도록 지시했다. 그 지시는 즉시 실천되었고, 우리 역사에는 지울 수 없는 오점이 찍혀졌다. 당시 조선교구장으로 명동 주교관에 있던 뮈텔 주교는 이 사건 발생 직후부터 이를 알고 있었다. 뮈텔은 이 사건의 경과를 매우 자세히 기록하여 남겨놓았다.

민비시해 사건의 배경

이 사건이 일어난 배경으로는 우선 일본의 침략정책을 들 수 있다. 일본은 조선침략 과정에서 1894년 청일전쟁을 일으켜서 승전했다. 청국과의 강화조약을 통해 일본은 청국에서 요동반도를 넘겨받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러시아를 비롯한 유럽국가의 반대로 일본이 요동반도를 차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한편, 청일전쟁 이후 조선에 미치는 일본의 세력이 강화되자 조선의 조정에서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배척하고자 했다. 이 계획의 중심에 민비가 있었다. 일본은 조선에 대한 침략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와 전쟁을 하거나 민비를 제거해야 했다.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할 자신이 없었으므로 민비를 제거하는 계책을 세웠다. 일본은 이를 추진하기 위해 문관출신이었던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 공사를 해임하고 육군중장 출신의 미우라 코로를 신임공사로 임명했다. 그는 조선에 부임한지 37일 만에 일본 낭인들을 사주하고 대원군을 이용하여 이 사건을 저질렀다.

민비시해 사건의 배경에는 흥선대원군도 개입되어 있다. 대원군은 민비 계통의 외척 세력들로부터 상당한 견제를 당하고 있었다. 그는 개항이후에도 조정에서 일정한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고, 때로는 정치적으로도 상당히 큰 힘을 발휘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민비와 대원군은 견원지간이 되었다. 여염집의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사이좋지 못할 때에는 가정 안의 문제로 그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들은 각기 國太公과 國母였다. 그들 사이의 투쟁은 곧 정치적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었다.

사실 대원군은 1894년10월 이래 정치에서 억지로 물러나서 서울 마포 공덕리 별장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도 그의 맏아들이자 고종 임금의 형이었던 이재면(李載冕)은 궁내부 대신으로 있었다. 대원군은 이재면을 통해 왕실의 동향을 정확히 파악하면서 재기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미우라 공사는 공사관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민비 살해계획을 ‘여우사냥’이란 암호명으로 부르면서 자신의 계획을 착착 실천에 옮겨갔다. 그는 대원군과 가까웠던 전직 조선 궁내부 고문관 오카모도 류노스케(岡本柳之助)를 중개로 하여 대원군을 이용할 계책을 세웠다. 미우라는 해산 위기에 처한 훈련대를 이용하여 이들에 의한 구데타로 위장하고, 이들이 입성할 때 일본의 낭인들을 동원하여 민비를 시해한다는 계책을 세워 실천했다.

이 계획의 전모를 대원군이 알고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원군은 일본측에 철저히 이용당했고, 민비 시해사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그는 정계에 더 이상 남아 있을 수 없었고 한을 품은 채 1898년 2월 22일에 세상을 떠났다.

을미사변과 뮈텔

뮈텔은 1895년 10월 8일 새벽 5시 15분경에 운현궁에 있던 교우 궁녀로부터 일본군이 당시 대원군이 기거하고 있던 마포 공덕리의 별장을 포위하고 있다는 전갈을 받았다. 일본인들은 그날 새벽 1시경에 대원군의 별장에 가서 대원군에게 입궐을 강요했다. 대원군이 이들과 함께 궁궐로 떠난 시간은 오전 3시경이었다. 아마도 이때를 전후하여 그 별장의 사람들이 이 일을 운니동에 있는 운현궁에 알렸고, 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 민씨는 궁녀를 시켜 이 사건의 의미를 10여분 정도의 거리에 떨어져 살고 있던 뮈텔에게 급히 문의한 듯하다.

▲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피살된 현장인 경복궁 내 옥호루의 모습.(1900년대 초 촬영) 지금 옥호루는 헐리고 없고, 대신 그 자리에 당시의 참상을 보여주는 기념각이 서 있다.

그러나 대원군 일행은 새벽 5시반경에 경복궁에 도착하여 궁문을 돌파하고, 6시 10분을 전후한 시간에 민비의 처소를 덮쳐서 그를 살해했다. 뮈텔은 6시경에 40명 가량의 일본 군인들이 궁궐을 향해 뛰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뮈텔은 미사를 시작했고 “이 가엾은 조선과 조선의 왕, 왕실, 그리고 조선정부 전체를 위해 자비로운 천주님께 아주 특별한 간청을 드렸다.” 미사가 끝난 다음 그는 대원군 일행이 대궐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날 아침 뮈텔 주교는 왕비가 죽었다는 소문도 들었고, 저녁에는 그 소문이 거의 확실하다고 하는 말을 또 들었다.

뮈텔은 처음에는 이 사건을 대원군의 복수극으로 판단했다. 민비가 시해된 다음날인 10월 9일 뮈텔은 민비가 죽었지만 그 죽음은 은폐될 것이고 그 시체는 불살라졌으리라는 말을 또 들었다. 이 이후 뮈텔은 민비시해사건에 관한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적어 그의 일기에 남겨놓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이번의 사건에 일본측이 깊숙하게 개입되어 있는 정황을 정확히 파악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뮈텔 자신도 민비가 죽었으리라 판단했다.

뮈텔은 이 사건 직후 일본인들이 이 사건의 내막을 조사하겠다고 한 사실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인들이 그런 식으로 조사하게 내버려 둔다면 그들은 자신이 무고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것임이 분명하다. 고발을 당한 사람들이 조사를 맡는 예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라고 격렬히 반발했다. 그리고 그는 이 사건과 관련하여 대원군과 일본인들이 함께 비난을 받고 있으니,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시켜야 하고, 대원군을 가두어 두어야 한다... 주모자들이 그들이기 때문이다.”라고 보았다.

뮈텔은 이 사건이 일어나기 40여일 전에 고종을 알현하여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은 바 있었다. 그때 뮈텔은 고종에게 선의와 헌신을 약속했다. 뮈텔은 을미사변이 일어난지 여드레 후인 10월 16일 서울주재 서양 외교관 등과 함께 고종을 다시 알현했다. 공식 알현이 끝난 후 고종은 뮈텔을 따로 조용히 불러 “나의 처지가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가져도 될까요. 나를 도와주시오”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에 뮈텔은 “물론입니다. 좋아질 가망이 있습니다.”라고 위로했지만, 그의 마음은 무척이나 착잡했다.

그러나 뮈텔은 민비의 생사에 대해서는 난무하던 소문을 듣고 기록에 남겼다. 즉, 그는 이미 10월 10일 경 민비가 죽지 않고 1882년에 일어났던 임오군란 때처럼 피신해 있다는 소문을 들은 바 있었다. 이와 같은 소문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래서 뮈텔은 10월 말경에 민비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민비의 죽음은 사실로 확인되었고, 친일내각에서는 이 사건의 주모자로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을 지목하여 처형함으로써 사건이 종료되었다. 이러한 광경에 뮈텔은 분노하고 전율했다.

▲ <월간중앙> 2005년 5월호가 명성황후의 젊은 시절을 추론하며 발굴 보도해 주목받은 사진

남은말

뮈텔 주교는 이 사건과 관련하여 조선에 대한 일본의 정책이 명확히 실패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뮈텔은 일본인들이 조선을 일본에 병합시키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뮈텔의 전망은 정확했다. 이 사건 직후 미우라 공사는 일본으로 도망갔다. 일본 정부는 10월 17일자로 미우라 공사를 해임하고 사건에 가담했던 일본인들을 히로시마 감옥에 가두어 놓고 재판을 하는 일종의 쇼를 벌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당연히 증거 불충분으로 인한 무죄방면이었다. 이를 뮈텔은 미리 예상했다.

10월 14일 미우라는 일본으로 귀환한 후 총리대신에게 보낸 비밀보고문에서 조선을 독자적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일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왕비를 시해했음을 밝혔다. 그리고 “이번 일은 그 방법이 좀 졸렬하여 남루(襤褸)를 숨길 수 없었다는 비방을 면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 목적을 잘 달성한 것이니 그 득실(得失)을 끝까지 잃지 말아 주기 바란다”고 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윤리에서는 좋은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당한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뮈텔 주교는 물론 이 비밀보고서의 내용을 알지 못했지만, 그들이 취했던 부당한 목적과 방법에 대해 강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조광  고려대학교 교수, 사학과 2008-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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