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3일 (연중 제4주일) 루가 4, 21-30. 1고린 12, 31-13, 13.

 지난 주일에 우리가 들은 복음은 예수님이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서의 몇 구절을 읽으신 이야기였습니다. 그 구절은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루가복음서를 기록한 사람은 예언서의 그 말씀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은혜로운 일들을 요약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그 말씀에 이어서 나오는 부분입니다. 예수의 고향 나자렛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씀에 탄복하였지만, 그들은 즉시 예수님의 출신을 문제 삼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잘 아는 목수, 요셉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분은 율사나 사제와 같이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는 신분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은혜로운 일들을 보았지만, 그것을 하느님과 연계하지 못하고, 예수님의 신분만을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과 더불어 구약성서 열왕기에 나오는 고사(故事)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사렙다 마을의 한 과부를 기근에서 구해준 이야기(1열왕 18,7-16)와, 엘리사 예언자가 시리아 사람 나만의 나병을 고쳐 준 이야기(2열왕 5,1-14)입니다. 그것은 모두 예언자를 통하여 하느님이 은혜로운 일을 하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은 분통을 터뜨리고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끌어내어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는 말로 오늘 복음은 끝났습니다.

회당의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분개한 것은 그분이 목수 요셉의 아들인 주제에 예언서를 자유롭게 인용하고, 그들이 존경하는 엘리야와 엘리사 두 예언자를 자기 자신에 견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에 대해 말하고 하느님의 일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여 하느님이 은혜로우신 분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엘리야와 엘리사가 한 일이 그 은혜로우심을 실천한 것이었다고 상기시켰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하신 그런 예언자적 역할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분을 미워하였고, 예수님은 그들의 분노에 괘념치 않고, 당신의 길을 가셨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 고을의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 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고을은 산 위에 있었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이야기의 무대인 나자렛은 실제로 산 위가 아니라, 산 아래에 있습니다. 지리적 실제 여건을 무시하면서,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죽을 위험에 처한 무대를 산 위로 잡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밖의 골고타 산 위,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사실을 연상시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예언자적 말씀과 행위를 처음부터 거부하였고, 그들의 분노와 증오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당신의 길을 가셨으며, 그 길은 결국 예루살렘 밖, 골고타 산 위의 십자가에서 끝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소외당하고, 차별 받는 이들에게 하느님이 은혜로우시다는 사실을 알리는 데에 있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고 제물봉헌을 잘 하는 것만이 신앙이라 믿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거짓 예언자로 보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믿는 하느님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은혜로운 분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강한 자가 약자를 희생시키는 것이 이 세상의 질서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놓고,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는 냉큼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보고 믿을 터인데”(마르 15,32)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초인적 힘을 한 번 발휘해보라는 것입니다. 인류역사가 의지하여 살아 온 힘의 논리입니다. 하느님은 강한 자와 함께 계신다고 믿어온 인류역사였습니다.

예수님은 약자로, 또 실패자로 죽어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읽으시면서 거론한 ‘가난한 이’, ‘잡혀간 이’, ‘눈먼 이’, ‘억압받는 이’는 모두 약자이며 실패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약자들 중 한 사람이 되어 죽어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그런 약자들과 함께 계신다고 믿었고, 하느님이 그들에게 하실 일, 곧 불쌍히 여기고 살리는 일을 당신도 실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 세상의 강자인 유대교 실세(實勢)들의 손에 생명을 잃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를 부르면서 죽어 가셨습니다. 약자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느님을 부르는 일뿐입니다. 그분의 부활은 하느님은 과연 약자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입증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의 강자와 함께 계시지 않고, 약자와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 같은 실천을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신앙은 하느님과 교섭하여 강한 자가 되어, 남을 억압하며 자기 한 사람 잘 살기 위한 수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주변의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외면하면서, 더 부요하게, 더 강하게, 더 화려하게 살기만을 원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의 일만 생각하는”(마르 8,33)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약자의 길입니다. 사랑은 강자로 군림하지 않고 약자가 되어 은혜로운 일을 행하게 합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어머니는 자녀 앞에 강자로 군림하지 않고, 약자로 행동합니다. 오늘 우리가 제2독서로 들은 고린토서는 사랑은 너그럽고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고 말하고,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모든 것을 견딘다.’고 말하였습니다.

심판하실 하느님이 아니라, 사랑하는 하느님,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믿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그 사랑과 은혜로우심을 실천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로우심을 유산으로 받아, 비록 십자가가 있어도, 그 사랑과 은혜로우심을 실천하며 살겠다는 약속이 담긴 아버지라는 호칭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울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 으뜸은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이 이웃을 위한 우리의 사랑 안에 살아 숨 쉬게 하는 것이 으뜸이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를 비롯한 여러 어른들의 사랑을 받으며 사람이 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자기 주변의 약하고 실패한 이웃들을 가슴에 품고 사랑하여, 그들이 살고 자라게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그 사랑 안에 머무는 일입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 숨 쉬시게 하는 일입니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1964년 파리에서 서품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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