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우의 그림 에세이]

 
두 사람의 관계를 갑(甲)과 을(乙)로 칭하는 경우를 요즘 많이 본다.
영업상의 관계라면 당연히 파는 자가 '을'이 될 것이다.
수요보다 공급이 적다면 파는 자가 '갑'이 될 수도 있다.
친구나 연인 관계에서는 '갑'과 '을'의 위치가 수시로 바뀌며 서로 길항하기도 한다.
그 정도는 귀엽다고 할까?
그런데 누구나 '을'의 위치에 서기 싫어하지 않나?
결혼 전, 상대를 오매불망 따라다니며 하늘처럼 떠받들던 사람이
결혼과 동시에 폭군처럼 군림하는 경우도 있다.
그간의 설움을 만회하기 위해서일까?

유명인사의 경우 그를 추종하는 무리가 생기지만
그에게 실망을 느끼는 경우 가차 없이 돌아서기도 한다.
본인이야 배신감을 느끼겠지만 원래 인심이란 그런 게 아닌가?
나랏일 하라고 세워줬더니 자신을 '절대갑'으로 착각하여 백성을 '을'로 보고
온갖 패악과 학정을 일삼을 때,
결국 민중 봉기가 일어나 순식간에 엎어버리기도 한다.

영원한 '을'의 자리에서 어떠한 실망과 배신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랑이 있다.
부모나 신의 사랑 같은...
그런데 그 '을'은 '을'이 아니다.
'절대갑'인 것이다.
우리 모두 그 사랑 앞에 오체투지 하듯 엎드리게 되니까
비루하고 초라한 존재를 믿어주고 품어주는 한결같은 사랑
이 팍팍한 세상에서 그나마 우리가 숨 쉴 수 있는 건 그런 사랑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나는 그 누구에게 자청하여 기꺼이 '을'이 될 수 있을까?
무한한 헌신과 섬김의 그 곤고한 길을 갈 수 있을까?

지구가 나를 중심으로 돌며
세상이 왜 내게 조복을 안 하는지,
왜 때때로 내 비위를 거스르는지 짜증을 내면서
하느님 다음으로 이 우주에서 '수퍼갑'이라 생각하는 내가 말이다.

윤병우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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