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의 역사의 창, 교회 11] 고종의 외교문서와 뮈텔 주교

구한말 조선왕조는 1905년 11월 17일에 체결된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을 통해서 외교권을 상실했다. 일본의 강박에 의해 단행된 이 조약에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는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의 국권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기대를 외국의 지원에 걸고 있었다. 1880년대 이후 조선이 외국과 맺었던 조약문에서는 조선이 독립국임을 명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1882년에 조선이 미국과 체결했던 한미조약의 조문에서는 일종이 연맹국적 성격까지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약문에 기대를 걸고 고종은 이 조약문의 원본을 지켜보고자 했다. 을사조약 이후 이 조약문은 뮈텔주교의 서고 안에 감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치사한 매국노들의 제보에 의해 이 조약문의 소재지가 밝혀졌고, 일제는 이를 압수해 갔다.

고종과 을사조약 무효 시도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이양하는 일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토오 히루부미(伊藤博文)를 비롯한 일본 제국주의 관료들과 이완용 등을 비롯한 조선관료들은 옥새를 위조하여 이 조약문을 공포했다고 한다. 물론 고종은 이에 저항했지만 고종의 주장은 친일파 관료들에 의해 묵살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고종은 조선의 외교권을 회복하기 위한 몇 가지의 방책을 마련하여 실천해나가고자 했다. 그 방책의 하나는 미국, 러시아, 영국 등에 호소하여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관철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중도에 좌절되었다. 또 1907년 5월에는 화란의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준(李儁) 등을 파견하여 국제회의에서 이를 호소해 보고자 했다. 물론 이 일도 실패했고, 이 사건으로 인해 고종은 퇴위를 강요당했다.

한편, 고종은 을사조약 직후 대한제국이 외국과 체결했던 조약문의 원본을 일본에 넘겨주지 않고 이를 지켜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이 조약문의 원본은 조선의 독자적 외교권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조선이 외교권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 서류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토오 히루부미는 이 조약문서들의 원본을 찾아내라고 다그쳤다. 그들은 고종에게 이 조약문의 원본을 인도하라고 강박했다. 그러나 고종은 이 조약문들이 을사조약 직전인 1904년 4월 14일에 일어났던 경운궁의 화재 때에 소실되었다고 둘러대고 조약문 원본의 인도를 끝까지 거부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 관료들과 친일파들은 이 말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다.

▲ 고종황제

조약문서의 원본들을 지키고자 했던 고종은 1906년 6월 11일에는 김조현(요한)을 시켜 이 조약문서를 담은 궤짝을 뮈텔에게 보관해 달라고 부탁했다. 궤짝은 밀봉되어 있었지만, 김조현은 이 상자에 조약문서의 원본이 있음을 뮈텔에게 알려주었다. 뮈텔은 1895년 이래 이미 고종에게 필요한 경우 황제를 돕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다. 그는 이 약속을 지켰고 상자를 받아서 주교관의 서류고에 보관했다. 이때 뮈텔은 상자 안에 든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상관하지 않겠으나 상자를 맡아주겠다고 말했다. 뮈텔은 “상자 하나와 열쇠 세 개를 인수함”이라는 인수증을 써주며, 이 인수증을 제시할 경우에만 보관물을 돌려주기로 약속했다.

그 후 1907년 헤이그에서 열렸던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등을 밀사로 파견되었던 직후 고종 황제의 조카였던 조남승이 인수증을 가져와서 뮈텔이 보관하고 있던 서류의 일부를 되찾아 가기도 했다. 그리고 고종황제가 퇴위한 다음이었던 1909년 5월 28일에도 조남승은 고종황제의 옥새가 찍힌 친서를 가지고 와서 문서의 일부를 가져가기도 했다. 그러나 서류상자는 뮈텔 주교의 문서고 안에 비밀리에 계속해서 보관되어 있었다.
 

고종의 비극

그런데 이 때 문제가 터졌다. 이에 앞서 고종은 1898년 콜브란이 설립한 한성전기회사에 일본돈 100만엔(50만 달러)을 투자한 바 있었다. 이때 고종이 미국계 회사에 서울의 전차부설권을 주며 왕실도 직접 투자했던 까닭은 미국의 지원을 끌어들이려던 의도 때문이었다. 이 투자건에는 한일합방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이완용을 비롯해서 이준용 및 조남승 등 6명이 함께 관여되고 있었다. 이들은 고종에게서 투자금으로 일본돈 100만엔을 받았으나 콜브란에게 60만엔만 투자하고 40만엔을 횡령했다. 투자금의 전달과정에서 배달사고가 난 것이다. 그리고 이완용 등은 100만엔 짜리 영수증을 위조하여 고종에게 전해 주었다.

그런데 1905년에 체결된 을사조약 이후 미국은 조선의 이권에서 점차 발을 빼갔고, 콜브란도 1909년 7월 이 회사의 그 이권을 ‘일본가스회사’로 넘겨주었다. 이 때 콜브란은 고종이 투자했던 60만엔을 이완용 등을 통해서 돌려주었다. 그러나 이완용 등은 이 반환금의 전달과정에서도 배달사고를 또 냈고, 그 일부만을 돌려주었다. 이에 고종은 자신이 투자한 100만엔 전액의 반환을 요구하다가 영수증이 위조되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고종은 탐관오리들에게도 사기를 당하고 있었다. 이는 고종의 비극이었고 조선의 절망이었다.

▲ 매국노 이완용

이 사건이 일어나자 당시 조선의 내정까지도 실제로 관장했던 일제 통감부에서는 총리대신 이완용을 잡아넣을 수는 없었지만, 조남승을 공금 횡령혐의로 구속하게 되었다. 물론 이완용도 일제 당국에 큰 약점을 잡히게 되었지만 벼슬이 낮았던 조남승은 이를 혼자서 뒤집어 쓸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이완용이나 조남승은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꾀를 세웠다. 즉, 고종의 인척이었던 조남승은 조선왕국이 외국과 맺었던 조약문서 원본의 행방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완용과 조남승 등은 이를 일제에 알려주고 자신들의 횡령죄를 사면받고자 했다. 이 때문에 뮈텔이 이 문서를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이 탄로되었다.

이 사실을 파악한 통감부 당국에서는 뮈텔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들은 당시 서울 이사청(理事廳)에 부이사관으로 근무하던 다카하시를 뮈텔에게 보내서 그 문서 상자의 반환을 요구했다. 일본옷 차림으로 뮈텔을 방문했던 그는 조선인보다 조선어를 더 잘했고, 뒷날 식민사관적 시각에서 <조선유학사>를 써서 한국사상사의 연구방향에 나쁜 영향을 크게 미쳤던 다카하시 도루(高橋亨)였음에 틀림없다. 뮈텔을 방문한 다카하시는 뮈텔에게 어떻게 그런 물건을 맡기로 수락하여 정치 문제에 말려들 수 있느냐고 힐책했다. 그러나 이 때 뮈텔은 그 문서가 조남승과는 다른 인물이 자신에게 맡겼고, 그 뒤에 조남승이 이를 부분적으로 찾아갔었음을 말했다. 그러나 다카하시가 요구한 전체 문서의 반환에는 응하지 않았다.

뮈텔은 이 문제를 서울에 주재하던 프랑스 외교관과 협의했다. 이 사건이 일어나던 당시는 을사조약으로 인해 프랑스 공사관은 이미 철수하고 프랑스와 조선의 관계가 단순한 영사관계로 전환되었던 때였다. 서울에 주재하던 프랑스 외교관 파이야르가 이 사건과 관련하여 뮈텔을 만나러 온 바 있었다. 이를 보면, 일제는 이 사건을 프랑스 정부측에 통고하고 항의했음에 틀림없다. 뮈텔을 방문한 파이야르는 뮈텔이 이 상자를 맡긴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건네기를 거부한 행동이 합법적이었음을 확인해 주었다.

▲ 뮈텔 주교

그러나 1910년 5월 6일 경찰의 인도를 받은 조남승과 김조현이 일본인과 함께 와서 고종황제가 1906년에 맡긴 상자의 반환을 뮈텔에게 요구했다. 이에 뮈텔은 당연히 이들에게 고종황제의 청구서류를 요구했다. 이때 조남승은 1907년 11월에 이미 고종황제가 물건을 모두 돌려달라는 친서를 보낸바 있음을 상기시켰다. 뮈텔은 서류를 뒤져서 이 친서를 다시 확인하고 물건의 반환에 동의했다. 이들은 버들고리 안에 든 봉함된 상자를 뮈텔 앞에서 개봉했다. 그 안에는 과연 ‘중요한 것들’이 들어 있었다.

남은말

이렇게 일제는 1910년 5월 6일 조선왕국이 미국, 프랑스 등 열강과 맺었던 조약문의 원본을 회수해 갔다. 그리고 예정대로 ‘한일합방’을 위한 수순을 밟아가고 있었다. 이 사건은 1910년 5월 하순에 일본에서 간행되던 신문과 서울에서 발간된 영자신문 <서울프레스>에도 실렸다. 그리고 그해 6월 러시아 정교회 신부로 서울에서 활동하던 파벨 신부는 이 사건을 뻬쩨르부르크에서 간행되던 러시아 선교지에 기고했다. 이 글의 말미에서 파벨 신부는 “불쌍한 고종은 황제였지만 기실은 수인(囚人)에 지나지 않았고, 자신의 총리대신이나 조카까지도 믿을 수 없었다”라고 말하며 선교사가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됨을 확인했다. 그러나 조선은 이렇게 망해갔고, 뮈텔은 그 멸망의 증인이 되었다.

/조광 고려대학교 교수, 사학과 2008-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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