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사제가 새 사제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

광주대교구 김희중 주교는 지난 1월 9일 광주 염주대건·경환성당에서 거행된 사제서품식에서 서품자들에게 “하느님과 사람 앞에 흠 없이 살아가기 바란다”면서 “입이 아닌 행동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자신의 이익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며 살아 달라”고 당부했다.

가톨릭교회의 1월은 각 교구의 사제서품식으로 분주하다. 지난해 12월 서품된 수원교구 14명의 사제를 비롯해 광주대교구 8명, 인천교구 10명, 대전교구 10명의 사제가 서품되었고 의정부교구는 1월 30일 6명의 사제가, 서울대교구는 2월 1일 21명의 사제가 서품될 예정이다.

최근에 출장 중에 한 은퇴 사제를 만나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석양의 그늘 아래 서 있는 사제는 새 사제들이 주교 앞에서 바닥에 엎드려 자신을 봉헌하는 광경을 바라보며 생각이 많았을 것이다. 녹록지 않은 사제생활을 예감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요즘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신앙쇄신’과 ‘사제의 쇄신’에 맞추어졌다. 사제는 ‘교회의 심장’이라고 부를 정도로 중요하고, 그 사제들이 신자들의 신앙 역시 돌보아야 하는 처지이기에 먼저 ‘사제의 쇄신’ 또는 사제갱신운동이 절박하다는 데 생각을 모았다.

▲ 사제는 '교회의 심장'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그만큼 사제의 품성과 사목적 태도가 교회의 향방을 가늠하기 때문이다. 가장 아름다운 사제는 자신의 심장에 그리스도를 담고 있는 사람일 텐데.. '공무원'처럼 처신하는 사제들을 바라보면 가슴이 아프다. ⓒ한상봉 기자

사제의 공감능력이 신자를 행복하게 만든다

성소위기가 심각한 유럽교회와는 달리 한국교회는 각 교구에서 매년 십여 명의 사제들이 배출되고 있다. 다행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유럽 교회의 위기에 따른 교황청의 '신앙쇄신'요청은 한국교회라고 예외가 될 수 는 없을 듯 하다. 따라서 ‘사제의 다량 배출이 아니라 질 좋은 사제의 배출’이 관건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사제 가운데서도 본당사제는 일선에서 신자들을 만나는 전위라는 점에서 한국교회 신앙쇄신의 일차적 담당자라고 볼 수 있다. 이에 그 신부님은 “본당 사제가 어떤 품성과 사목적 태도를 지녔는가에 따라 본당 신자들은 성당에 나오는 것이 행복하기도 불편하기도 하다”고 말하면서 “신자들은 사제를 바라볼 때, 강론을 잘한다거나 사교성이 좋다거나 노래를 잘 부르거나 하는 점만 보지 않는다. 사제는 본당 안에서 미사 전례만 하는 게 아니라 성사와 교육과 행정과 관련해 전면적으로 신자들과 만나기 때문에 자신을 온전히 숨길 수 없다. 신자들은 사제 앞에서 말을 꺼내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본당 사제를 평가하고 때로는 존경하기도 때로는 한심해하기도 하며 본당 사제가 바뀔 날만 손꼽아 기다리거나 마음 깊이 사제를 흠모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이 신부님은 사제의 공감능력을 강조했다. 사제가 신자들의 기쁘고 슬픈 이야기를 들을 줄 알고, 그들의 희로애락에 공감할 줄 알아야 신자들이 사제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한다는 이야기다. 그는 “신자들은 사제에게서 보살핌을 받는다고 느낄 때, 사실상 사제를 보살피게 된다”고 덧붙이며, 사목을 ‘일’로 취급하지 않고 ‘삶’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그래서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근 신자들은 사제들에게서 ‘거룩함’의 요소를 발견하기보다 안정된 생활이 보장된 ‘교회공무원’을 발견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 신부님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내가 여러분을 위해서는 주교지만,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말한 것을 상기시키며 “사제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사제는 사제 이전에 그리스도인이며, 예수의 제자라는 점을 새겨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제는 말씀을 전하기에 앞서 먼저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신부님은 “사제는 그리스도의 몸을 신자들에게 주지만 자신도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먹어야 한다. 사제는 다만 신자들과 다른 사목적 직무를 받았을 뿐, 예수의 제자라는 점에서 평등하다”며 “신자들은 관리대상이 아니라 동등한 형제자매”라고 말했다. 이처럼 사제는 높은 곳에서 양 떼들을 막대기로 탁탁 치면서 양 떼를 모는 목자가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 안에서 신자들과 동행하는 자라 불러야 옳다. 그러니 사제 역시 신자들처럼 스스로 양육되어야 복음을 제대로 전할 수 있다는 말이다.

▲ 하느님의 자비하신 품 안에 진입할 날을 헤아리고 있는 자의 시선은 늘 제 삶을 원천으로 돌아가게 한다. 은퇴 이후 여유로운 생활을 꿈꾸며 '곗돈'을 붓는 사제들보다, 사제생활이 오래될수록 무엇을 더 덜어내야 하는지 고민하는 사제가 그립다. ⓒ한상봉 기자

축복이 되는 사제의 허약함과 상처

강우일 주교는 “교회는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친목단체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교회는 “서로 다른 취향과 신념, 체험을 한 이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공동체”로서, 불청객마저 받아들일 수 있는 환대의 정신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교회가 획일성에서 오는 일치가 아니라 다른 이들이 함께 모여 살 수 있는 공동체라는 뜻이다. 그래서 신부님은 본당 사제들이 독단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공동체 안에서 사는 게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대체로 본당 구조 안에서 유일한 권위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제들은 종종 자신과 생각이 다른 신자들과 공존하는데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심지어 본당 수녀와 갈등을 빚는 예도 있다. 그런데 사제가 다른 이들과 조율을 할 수 없을 때, 신자들은 난감해진다. 사제가 신자들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신자들이 사제를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한다. 이런 점에서 본당 사제들도 공동체 안에서 사는 훈련이 필요하다.”

신부님은 “나이 든 사제일수록 신자들의 반대를 견디기 어려워한다”고 말했다. “한평생 하느님의 사람으로 헌신적으로 살았는데...”하는 억울함 때문에 상처 입기 쉬운 까닭이다. 그는 “사랑이 많은 사람일수록 상처받기 쉬운 법”이라며 “하느님의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상처 때문에 사랑을 멈추지는 않는다”고 덧붙였다.

한편 신부님은 사제들 가운데 심리적 공황상태를 경험하는 이들도 많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그러나 사제들이 스스로 허약함을 체험하는 시간은 사제생활에서 ‘축복’이 될 수도 있다 했다.

“대부분의 사제는 본당구조 안에서 다양한 직무에 시달리는데, ‘일 중심’에 빠지게 된 사제는 ‘나의 능력과 성과’에 집중하기 쉽다. 그러나 사제의 삶의 뿌리는 하느님의 자비다. 약함 속에서 사제들은 자신의 깊은 뿌리인 자비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실수를 인정하는 사제의 용기

신부님은 “교회가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토대 위에서 건설되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고 말했다. 베드로는 못난 사람이었는데 예수의 인정을 받았고, 바오로는 잘난 사람이었는데 예수 때문에 못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제들의 결함과 인간적인 약함은 잘못이 아니라고 말했다. “교회 안에서 사제들에게 요구하는 도덕적 기준이 높아서, 사제들은 흔히 죄의식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다른 신자들의 죄를 용서하시듯이, 사제들의 죄도 용서해 주신다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사제들을 격려했다.

▲ 교회공동체는 성인들이 아니라, 죄인들의 공동체이기도 하다. 사제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 안에서도 하느님의 축복을 경험한다. 우리의 약함과 부서진 영혼 속으로 하느님의 자비가 침투하기 때문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죄를 신자들 앞에서도 고백하고 용서를 청할만한 믿음과 용기가 있는지 여부다. ⓒ한상봉 기자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결국 사제들이 경험하는 의지적, 심리적, 영적 약함은 오히려 사목 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스스로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사제는 부족한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이런 사제들은 본당구조에서 사목 위원을 선정하거나, 친목단체 같은 동아리 집단을 형성할 때 의사, 변호사, 서울대 출신 등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자신처럼 완벽한 듯이 보이는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거나, 자신의 부족함을 동아리 안에 들어온 이들의 수준으로 보상하려고 드는 것이다. ‘나 이런 사람과 사귄다’며 타인을 통해 자신의 격을 높이려는 어리석은 발상이다. 물론 여기에는 그들을 통해 심리적 물적 지원을 받기 위함도 포함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신부님은 사제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덧붙였다. “사제는 자신이 상처받고 이를 인정하는 만큼 치유되고, 치유된 만큼 상처 많은 타인을 보살필 수 있다”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용서를 청할 수 있는 사제의 용기’라고 말했다.

“사제들은 고해성사를 통해 신자들의 죄를 용서해 주지만, 정작 자신들은 용서를 청하는데 익숙하지 않다. 교구와 본당에서 사는 사제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한때 실수할 수 있고,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그러나 잘못이 드러났을 때조차 이를 인정하고 신자들에게 용서를 청하지 못한다. 하느님 앞에서 모두가 죄인이라는 생각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관성화된 ‘사제 권위주의’가 사제로 하여금 하느님 앞에 나아가고, 신자들과 화해하는 길을 가로막는다.”

가톨릭교회는 다른 교단보다 ‘성직자의 추문’을 쉬쉬하는 관행이 있다. 사제의 위신이 깎이면 교회의 위신이 내려앉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제 역시 사람인지라 수없는 실수 가운데서 살아간다. 완전한 인간이 사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에 대한 갈망으로’ 사제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교회사에 드러나는 성인들 역시 한때 추문에 휩싸여 있던 사람들이 꽤 많이 발견된다. 그러나 이들이 성인인 까닭은 ‘회심’하였기 때문이다. 실수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부끄러운 것이다. 그래서 사제의 결함은 장애물이기도 하고 축복이기도 하다. 자신의 결함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서 흠 있는 사제가 가장 아름다운 사제가 될 수 있다.

2013년 새해가 벌써 시작되었고,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제들도 나름대로 신년 계획을 세우고 있을 것이다. 좀 더 나은 사제가 되자고 작심할 것이다. 하느님을 위해 한 몸을 던지기로 약속한 사람이기에, 좀 더 분명한 걸음으로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고 싶을 것이다. 사람이 노년이 되면 서쪽 하늘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집을 짓고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붉게 타들어 가는 황혼을 바라보며, 자신의 종말을 생각하며 지금 여기에서 나를 온전히 살아가라는 뜻이다. 그날 한 은퇴 사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도 한때 젊은 홍안의 새 사제였음을 짐작한다. 주님, 저희를 받아주소서! 당신 그늘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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