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의 역사의 창, 교회 9]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유력한 인물이 등장하게 되면 그와 관련된 친인척의 존재가 함께 부각되기도 한다. 유럽의 교회사에서는 역대 교황 중에 친인척 관리를 잘못하여 지탄을 받는 인물도 나타난 바 있었다. 살아있는 권력자가 친인척에게 권력을 나누어 주는 일은 혈연을 중시하던 전근대 사회의 한 유물로 평가된다. 그러나 친인척 관리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닌 듯하다. 오늘의 우리까지도 친인척 관리를 잘못하여 곤욕을 치룬 인물들과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안중근은 죽어서도 친인척 관리에 남다른 역할을 발휘하고 있었다. ‘애국선열’이며 ‘신앙인’이었던 안중근의 모범은 그의 친인척을 채근하여 민족 독립을 위한 바른 길로 내닫게 했다.

안명근의 독립운동

안중근의 친인척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 할아버지 대까지는 소급해 올라가야 한다. 안중근의 조부는 아들 여섯 명을 낳았다. 이 가운데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그 세 번째 아들이었다. 남자 형제가 많은 만큼 안태훈은 매우 번성한 집안 출신이었다. 안중근에게 두 명의 백부와 세 명의 숙부가 있었다. 그리고 근자(根字) 항렬의 4촌 형제들이 열한 명이었고, 이들이 소생인 생자(生字) 항렬의 6촌 조카들이 적어도 스물 두 명은 되었다.

안중근의 친인척 가운데 독립운동을 위해 노력했던 주요한 인물로는 안명근(安明根, 1879-1927)을 들 수 있다. 그는 안중근의 중부(仲父)인 안태현의 맏아들이었다. 안명근은 1910년 말에 발생한 ‘안악사건’ 혹은 ‘안명근 강도사건’의 주모자로 등장하고 있다. 안악사건은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해 황해도 일대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금하던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안명근은 이 사건으로 인해서 체포되어 1911년 7월 22일 강도급강도미수죄(强盜及强盜未遂罪)로 종신징역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그가 체포되던 과정에서는 당시 서울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가 개입되어 있었다. 뮈텔 주교는 황해도 신천 청계동에서 선교하던 빌렘 신부를 통해서 안명근이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식민지 조선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던 사람은 조선총독부의 정무총감이었던 아카시 장군이었다. 아카시는 일찍이 파리주재 일본공사관의 무관으로 근무한 바 있었고, 아마도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듯하다. 그는 프랑스인 선교사 뮈텔 주교와 가깝게 지냈다. 거기에는 물론 조선에 나와 있는 선교사들을 회유하려던 식민당국의 복선이 깔려 있었다. 그런데 뮈텔은 안명근이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카시에게 직접 찾아가 알려주었다. 물론 뮈텔의 제보가 있기 전에 총독부 헌병경찰에서도 이미 이 사건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뮈텔의 행동에 대해 총독부에서는 특별한 감사를 표시했다.

 

뮈텔 주교의 이와 같은 행동은 안중근 사건으로 인해서 조선천주교회가 일본 식민지 당국자들에게 실추당한 체면을 회복해야 한다는 교회행정가의 입장에서 내린 판단의 결과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서 안명근의 체포는 당겨졌고, 안명근의 독립운동 사건은 이른바 ‘데라우찌 총독 암살미수사건’ 혹은 ‘105인 사건’으로 확대 조작되어 많은 애국지사들이 죽음과 고통을 강요당했다.

그런데 오늘날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일부 인사들은 이 사건을 가지고 뮈텔 주교가 고해비밀을 누설하여 안명근을 고발했고, 총독부로부터 고발의 반대급부를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해비밀 누설이라는 주장은 결코 사실이 아니며, 이는 고해비밀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의 잘못된 주장일 뿐이다. 물론 뮈텔 주교는 안명근의 형(刑)이 확정된 다음 그의 석방을 위해서도 노력한 바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사건과 관련해서 나타난 뮈텔 주교의 단견은 한국교회사의 어두운 부분으로 두고두고 기억될 것이다.

안명근은 1926년 가출옥으로 석방되어 신천 청계동에서 천주교 관계의 일을 거들다가 나중에 만주 길림성 의란현 팔호력(八虎力) 원가둔(袁家屯)으로 이주했다. 그는 이곳에서도 천주교 전교에 종사했다. 그러던 중 어떤 신자의 종부성사에 배석하고 나서, 이질에 이환되어 일주일 동안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안명근 사건의 생존인사들과 함께] 백범은 환국후 안명근사건에 연루되어 심한 고초를 겪었던 옛동지들과 함께 서대문감옥을 방문했다.백범 왼쪽의 김홍량은 도산과 함께 신민회 주도인물 중의 하나로 백범이 양기탁 주도의 비밀회의에 참석, 황해도 대표를 맡아 신민회 무장투쟁 자금 15만원 모금에 나서자 선뜻 토지와 가산을 내놓은 바 있다. 사진 앞줄 왼쪽부터 김홍량, 백범, 도인권, 둘째줄 왼쪽부터 감익용, 최익형, 한사람 건너 우덕순(1946년 1 월23일 서대문감옥에서)

그 밖의 친인척들

안중근에게 마지막 성사를 집전하기 위해 주교의 명령을 어기고 여순 감옥에 갔던 빌렘 신부는 그 후 동료 선교사들에게 왕따를 당했고, 결국은 조선선교지에서 쫓겨나 프랑스로 추방되었다. 이때 그는 안중근의 사촌인 안봉근(安奉根)의 독일유학을 주선해서 함께 동행하여 조선을 떠났다. 그후 안봉근은 베를린에서 거주하다가 나치스에게 추방되어 이탈리아로 갔다. 이는 안중근의 친인척 중 일부가 이탈리아와 인연을 맺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30년대 초 상해에는 안중근의 사촌인 안경근(安敬根)이 있었다. 그는 안중근의 숙부인 안태민(安泰敏)의 맏아들이었다. 안경근은 1918년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항일운동을 전개한 바 있고, 1925년에는 중국 운남군관학교 졸업하고 나서, 만주에 세워진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에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1930년 상해로 와서 백범 김구를 보좌하며 항일 운동을 계속했고, 독립운동가인 이회영(李會榮)의 밀고자를 수색하던 작업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그는 “자상하고, 재치 있고 인정이 넘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도 자신의 사촌형 안중근처럼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운동의 선봉에 서 있었다.

한편, 해방 이후에도 안중근의 가문과 연결되는 인물들에 관한 기록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 예로써 우선 안악인 최익형(崔益馨)을 들 수 있다. 그의 아내는 안명근의 누이였던 안익근(安益根)이었다. 그는 처남인 안홍근(安洪根)과 함께 해방 이후 옹진으로 이사하여 옹진중학 서무주임을 하면서 적산 과수원 1만여 평을 매입하여 이를 함께 경작했다. 이들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미처 후퇴하지 못했던 국군 5인을 자신의 과수원에 숨겨주었다가 1950년 10월에 발각되어 공산군에 체포되었다. 이들은 그해 10월 15일 경 후퇴하던 공산군에게 총살당했다.

안홍근의 셋째 아들은 안무생(安武生)이었다. 안무생은 일제말엽 간도지방의 교우촌 가운데 하나였던 해북촌(海北村)에 살던 중 강도에게 피살되었다. 그의 아내 차로길(車路吉, 루시아)은 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라 아예 안로길로 개명할 만큼 안씨 가문의 아내됨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안 루시아는 남편이 죽자 하르빈으로 이주해서 살았다. 중국에 인민정권이 들어선 1949년 이후 안로길(루시아)은 중국천주교 애국회에 참여를 반대하던 김선영 신부와 임복만 신부를 도와 일하다가 이들이 투옥되자 그 옥바라지를 감당해 갔다.

그러다가 자신도 애국회의 미사 거행을 방해한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안로길은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다음에도 내몽고지방으로 끌려가 20년간 ‘노동개조농장’에서 강제노동을 했다. 무의탁 노인이었던 그는 겨우 1999년에 이르러서야 그 농장을 떠나 하르빈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이제 안로길은 90년을 지탱해준 늙은 몸을 누일 방 한 칸을 겨우 마련해서 남편과 시숙 안중근이 기다리는 천국으로의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 안중근과 그 일가들이 다녔던 천주교 청계동 본당과 교우

남은말

안중근의 친인척에게 있어서 안중근은 평생 우러러야 할 사표(師表)였고, 옳은 길을 걷도록 이끌어 주던 길잡이였다. 훌륭한 인물을 배출한 집안의 사람들은 때로는 그 어른 때문에 자신의 행동거지에 제약을 받게 되는 부담을 감내해야 할 때도 있었을 법하다. 그러나 안중근의 친인척들은 대부분 안중근과의 관계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그의 삶을 본받고자 했다. 안중근의 조카 중 하나로는 현재 서울에서 살고 있는 독립유공자 안춘생(安椿生)도 있다. 그를 비롯하여 안중근의 가계에 속하는 많은 사람들은 북풍한설을 마다하지 않고 민족의 광복을 위해 투신했다. 그들은 신고로운 삶을 살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일제의 추적을 당했다. 민족이 해방된 이후에도 그들은 남한정권의 이승만에게 배척당하거나, 북한의 인민군에게 피살되기도 했다. 이들의 삶은 탄압받고 찢겨져 있던 우리 현대사의 축도판이었다. 그러나 이들을 하나로 엮어 준 것은 안중근이 믿던 천주교 신앙이었고, 안중근이 가지고 있던 민족애였다. 우리에게 안중근과 그 친인척들이 있었음에서 우리나라 근현대사와 교회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이 기사는 <가톨릭인터넷언론-지금여기> 2008년 7월 15일자에 실렸던 것입니다) 

조광 (고려대학교 교수, 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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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뮈텔(Mutel 민덕효)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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