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파노라마-7]

고대 이집트 암벽화의 정수(精髓)를 보여주는 서헤이르 섬과 아스완 채석장을 둘러보고 난 후에, 다시 허름한 돛단배에 올라 룩소르(Luxor)로 향하였다. 천천히 물살을 가르며 상(上)이집트에서 하(下)이집트로 향하는 파피루스 우거진 강 언덕에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콤옴보(Kom Ombo)와 에드푸(Edfu)신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악어 머리 형상을 한 홍수의 신 소베크(Sobek)와 매의 머리 형상을 한 호루스 신을 모신 두 개의 신전을 동시에 결합해 놓은 곳으로 유명한 콤옴보와, 현존하는 이집트의 모든 신전 가운데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하는 에드푸 신전을 지날 때마다, 친절한 누비안 뱃사공은 나에게 내려서 신전을 둘러보라고 권했다. 그러나 배려는 고마웠지만,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어제 ‘파라오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이시스 여신을 위해 건립된 신전에서 받았던 놀라운 감성적 충격을, 아직 내면의 언어로 온전히 여과(濾過)해내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 나일 강, 선착장 주변 풍경. ⓒ수해

1902년 아스완 댐과 1971년 아스완 하이 댐이 완공된 뒤, 나일 강 위에 있던 20여 개의 신전과 옛 무덤들은 대거 수몰위기를 겪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시스 신전이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가장 성스러운 섬’이라고 생각했던 필라에 섬의 이시스 신전은, 아스완 댐 건설 이후 30년간 매년 약 4m 정도 물에 잠기는 위기를 겪다가, 1972년 유네스코에 의해 4만 개의 블록으로 절단되어 8년간의 지난한 작업을 걸친 끝에, 인근의 아기르키아 섬으로 완벽히 이전되었다. 지금도 신전의 기둥 구석구석에 남아있는 물 때 자국들이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적나라하게 반영해주고 있는 이시스 신전은, 바깥마당-제1탑문-안마당-제2탑문-기둥복도-성소가 일직선으로 배치되어있는 특수한 건축구조를 이루고 있다.

기원전 394년에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인 히에로글리프((Heiroglyphe, 그리스어로 ‘거룩한 기록’을 의미)를 마지막으로 사용한 비석이 남아있는 이 신전은, 선착장에서 내려 제1탑문을 지나 안마당으로 들어서면 서쪽에 호루스 신의 탄생을 상징하는 탄생의 집 ‘맘미시(Mammisi)’가 자리하고 있고, 안마당 동쪽에는 36개의 둥근 돌기둥이 줄지어 서 있는 큰 기둥복도가 있다. 석조기둥의 머리에는 연꽃 위에 하토르 여신의 얼굴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안마당에 이어 제2탑문을 지나면, 다시 10개의 돌기둥이 줄지어 서 있는 작은 기둥 복도가 나타나면서, 그 안쪽에 성소가 자리하고 있다. 성소의 기둥복도에는 황도십이궁(黃道十二宮, 춘분점을 기점으로 지구를 중심으로 한 천구상의 태양궤도인 황도대를 12구간으로 나누어서, 각각의 별자리 이름을 붙인 것)을 상징하는 12개의 방이 있다.

▲ 이시스 신전 안마당과 제2탑문 전경. ⓒ수해

현재 아기르키아 섬에는 이시스 신전 외에도, 이 신전을 최초로 건립했던 넥타네보 1세(Nectanebo I, BC 380~362년 재위)의 신전과 하토르 신전 유적, 로마 황제 ‘트리얀의 정자(Trajan’s Kiosk)’를 비롯한 로마 시대에 걸쳐 건립되었던 다양한 건축물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313년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이집트의 모든 신전은 폐쇄되었으나, 이시스 신전만은 유일하게 폐쇄되지 않은 채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그 뒤 540년에는 이 신전도 결국 폐쇄되어 기독교의 예배당으로 사용되었다. 그 때문에 지금도 지성소가 자리하고 있는 신전의 석조기둥과 벽면에는, 구석구석 콥트교도들이 새겨놓은 십자가 문양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엘레판티네 섬의 크눔신전과 마찬가지로, 신전 외벽에 나일 강 수위 측정표를 설치해 놓고 수시로 나일 강의 범람을 측정했던 이시스 신전의 계단식 나일로 미터를 살펴보고 나자, 내내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궁금증이 있었다. 도대체 이 많은 돌들은 모두 어디서 온 것 일까.
풀리지 않는 화두(話頭)의 비밀처럼 궁금증을 유발시키던 의문은, 다시 소형보트를 타고 육지로 나와, 아스완 시내 중심부에서 남쪽으로 1Km쯤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고대의 채석장(採石場)에 이르러서야, 가까스로 풀렸다.

예로부터 국토의 95%가 사막인 이집트에서, 아스완은 유일하게 화강암이 다량 분포되어 있는 지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 고대 파라오 시대로부터 그리스 로마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집트 전역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신전과 피라미드 건축에 사용된 돌들은, 모두 아스완 채석장에서 캐낸 돌을 이용하여서 만들어졌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피라미드 건설 당시는 청동기시대였기 때문에, 화강암을 잘라낼 도구가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고대 이집트인들은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이 단단한 화강암을 잘라낼 수 있었을까.

증폭되는 의문 해결의 단초는, 채석장 주변에 흩어져있는 홈들이 제공해 주고 있었다. 고대인들이 돌을 떼어낸 흔적이 역력히 남아있는 채석장 주변의 수많은 홈은, 대부분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균등한 크기로 구멍을 판 다음에, 거기에 나무쐐기를 박은 다음 나무쐐기에 물을 부으면, 불어나는 물의 압력으로 나무쐐기가 서서히 팽창되어, 그 팽창된 힘을 이용하여 돌을 잘라냈던 것 이다. 이렇게 잘라낸 석재들은, 우기에 나일 강이 범람할 때 불어난 물살을 이용하여, 배에 실려 이집트 전역으로 옮겨졌다.

고대인들이 돌을 다루던 방법을 유추하게 해주는 수많은 흔적과 함께, 화강암 벽면에 섬세하게 그려진 다양한 암벽화들을 둘러보다가 보니, 드넓은 채석장 언덕 한편에 길게 드러누워 있는 미완성 오벨리스크(Obelisk, 고대 이집트에서 태양숭배의 상징으로 세웠던 사각형 기념석주)한 기가 시야에 들어왔다.

▲ 아스완 채석장(왼쪽), 미완성 오벨리스크와 두 손에 헤나문신을 한 누비안 아가씨.(오른쪽) ⓒ수해

길이 42m, 바닥면적 4m²의 이 거대한 미완성 오벨리스크는, 원래 룩소르의 카르나크(karnak) 대신전 안에 자리하고 있는 투트모세 3세(Thutmose III, 1504~1450년 재위)의 신전 앞에 세우려고 했던 것인데, 작업 도중에 몸체에 균열이 생기는 바람에 완성을 보지 못하고, 수천 년을 노상에 그대로 방치되어 오고 있었다.

인적 드문 고대의 채석장 위로 작열하며 쏟아져 내리는 직사광선을 고스란히 받으며, 미완성 오벨리스크 주변에 앉아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고 명상을 하다가 보니, 서서히 무미건조해 보이던 오벨리스크 표면에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음영(陰影)이 짙어가는 미완성 오벨리스크 위로 자연스럽게 포개지는 또 하나의 영상이 있었다. 바로 천불천탑(千佛千塔)의 가람으로 유명한 화순 운주사(雲住寺)에 자리하고 있는 와불(臥佛)의 모습이다.

비운의 시대를 한발 앞서 걸어갔던 눈 밝은 수행자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의 비보풍수(裨補風水, 자연적 여건이나 환경에 부족한 점을, 인위적 혹은 인문적 사상을 보태어 보완하고 개선함으로써, 이상향을 지표공간에 구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함)에 담긴 심원한 철학사상이, 장쾌하고 역동적인 모습으로 지상에 구현되었던 미륵신앙(彌勒信仰)의 도량 운주사에 들어서 보면, 병신, 광대, 벅수모양을 한 온갖 형태의 불상(佛像)들이, 저마다의 깜냥으로 기다림의 노래를 열창하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운주사의 와불은 도선국사가 하룻날 하룻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세워 새로운 세상을 열어 보고자 했으나, 공사가 끝나갈 무렵 일하기 싫어한 동자승이 “꼬끼오”하고 닭소리를 내는 바람에 석수장이들이 모두 날이 샌 줄 알고 하늘로 가버려, 결국 일어서지 못한채 그대로 땅바닥에 누운 와불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와불이 일어나는 날, 백두대간의 정기가 굽이쳐 흐르는 그 땅에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고 하는 신비한 전설이 전해져오고 있다.

점차 음영이 짙어가는 미완성 오벨리스크를 바라보면서, 미륵과 메시아(Messiah)의 이름으로, 수없는 세월을 한결같이 소외된 민중들의 삶에 ‘희망과 구원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동서양의 미륵신앙과 메시아신앙에 담긴 독특한 사유구조를 비교 분석해보다가, 이윽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 테베의 황혼. ⓒ수해

다음날 오후, 군데군데 전통적인 방식으로 펠루카를 만드는 장인들의 모습이 보이는 강변을 지나, 한 송이 갓 피어난 백합을 연상시키는 흰 돛단배들이 물살을 가르며 유유히 항해하는 나일 강 위를 달리는 나룻배에 올라 무한한 상념의 나래를 펼치노라니, 어느덧 배는 룩소르 선착장에 당도하고 있었다.

고대이집트 신왕국 시대 수도 테베(Thebes)의 중심지였던 룩소르 선착장에 내리자, 가로등이 희미하게 내리비추는 종려나무 아래 놓인 벤치에 앉아, 나에게 최초로 ‘지중해의 영감’을 심어주었던 장 그르니에의 불후의 명저《섬》에 나오는 문장을 기억해내고, 황혼이 내린 테베의 강안(江岸)을 바라보면서, 몇 번이나 거듭 의미심장한 글귀를 읊어나갔다. 바다 위에 떠가는 꽃들아, 가장 예기치 않은 순간에 보이는 꽃들아, 해초들아, 시체들아, 잠든 갈매기들아, 배의 이물에 갈라지는 그대들아, 아, 내 행운의 섬들아! 아침의 예기치 않은 놀라움들아, 저녁의 희망들아, -나는 그대들을 이따금 다시 보게 되려는가? 오직 그대들만이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그대들 속에서만 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 티 없는 거울아, 빛없는 하늘아, 대상 없는 사랑아.

 

 
 
수해 (기행문학가)
운문사 강원을 졸업하고, 오랫동안 세계 여러 나라의 명상사원과 문화유적지를 순례하다가, 동국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지은 책으로 시집《산 두고 가는 산》과 동아시아 기행 에세이《예정된 우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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