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의 역사의 창, 교회 7]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하르빈 정거장 플래트홈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제거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직후부터 일제의 침략에 시달리던 조선인과 중국인들은 대부분 그를 영웅으로 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영웅호걸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살붙이를 생각하게 마련이다. 서른한 살 한창 나이의 청년 안중근도 죽음을 앞에 두고 연로하신 어머니를 생각했다. 그리고 어린 자식들과 함께 살아갈 아내를 걱정했다. 안중근의 사랑을 독차지했을 맏아들 분도를 그리워했다.

안중근의 유언

안중근은 안태훈(베드로)과 조마리아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김아려(金亞麗,아녜스)와 결혼해서 2남 1녀를 두었으니, 장녀 안현생(安賢生)과 맏아들 분도, 둘째아들 준생(俊生, 마태오)이 그들이다. 안중근의 의거 당시 그의 부친은 이미 서거했지만, 모친이 생존해 있었다. 안중근은 죽기에 앞서 자신의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자신의 사촌인 안명근(安明根) 및 여러 숙부들에게 유서를 남겼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세례를 준 빌렘(洪錫九) 신부와 당시의 조선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에게도 유서를 남겼다. 그의 친동생인 안정근(安定根)과 공근(恭根)은 여순 감옥에서 직접 만날 수 있었으니, 이들에게도 유사가 아닌 유언을 남겼을 것이다.

이때 안중근은 아무래도 눈에 밟히는 여섯 살 박이 맏아들 분도를 가장 많이 생각했고, 그에 관한 당부의 말을 특별히 남겼다. 그는 어머니에게 보낸 유서에서 장손 분도가 신부가 되어 자신의 일생을 천주님께 바치도록 교양해 달라고 부탁했다. 또한 안중근은 그의 아내에게도 다음과 같은 유서를 보내 이를 강조했다. “찬미예수. 우리들은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천주님의 안배로 배필이 되고 다시 주님의 명으로 이에 헤어지게 되었으나, 또 멀지 않아 주님의 은혜로 천당 영복의 땅에서 영원히 모이려 하오. 반듯이 육정(肉情)을 고려함이 없이 주님의 안배만을 믿고 신앙을 열심히 하고 모친에게 효도를 다하고 두 동생과 화목하여 자식의 교양에 힘쓰며 세상에 처하여 신심을 평안히 하고 후세 영원한 낙을 바랄 뿐이요. 장남 분도를 신부가 되게 하려고 나는 마음을 결정하고 믿고 있으니까 그리 알고서 반드시 잊지 말고 특히 천주님께 바치어 훗날에 신부가 되게 하시오. 허다한 말은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즐겁게 만나보고 상세히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 것을 믿고 또 바랄 뿐이오.”

현재 이 유서의 원본은 남아있지 아니하다. 그러나 이 유서는 거의 틀림없이 한글로 작성되었고, 이에 기초하여 일본어로 번역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읽는 안중근의 이 귀한 유서는 이 일본어 번역본을 중역한 것이다. 그런데 한글로 다시 번역하는 과정에서 일본인 번역자가 범한 오류가 남아있고, 일본식 표현을 직역했기 때문에 현재의 번역본에는 문제가 많다.

안중근의 가족

의거 이전에 안중근은 동료에게 자신의 가족을 국외로 불러오도록 부탁한 바 있었다. 그리하여 안중근의 처와 자식들은 하얼빈 의거 전에 조선을 떠났고, 안중근의 의거가 단행된 다음날 하얼빈에 도착했다. 하얼빈에 뒤늦게 도착한 그의 처자식들은 유승렬의 도움으로 러시아령 연해주의 꼬르지포로 옮겨가 살게 되었다. 유승렬은 그 지역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재정적으로 안중근을 지원한 바도 있었다. 그의 아들 유동하는 안중근 의거 직후 함께 체포되어 재판을 받기도 했다.

안중근이 순국한 직후 연해주에서는 ‘안중근유족 구제 공동회’가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이 모임의 주선으로 1910년 10월경에 이르러 이곳에는 안중근의 어머니와 첫째 동생인 안정근 내외 및 안공근 등 안중근 일가 여덟 명이 모여 살게 되었다. 그 후 안중근 가족은 1911년 4월 경 꼬르지포에서 10여 리 떨어진 조선인 마을 목릉(穆陵) 팔면통(八面通)에 옮겨 살게 되었다. 안중근의 가족은 도산 안창호 및 이갑(李甲)의 도움으로 이곳에 이주하고 ‘열여드레 갈이’ 농장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중근 가족에 대한 일제의 추적은 이 마을에까지 이르렀다. 1911년 여름 이 마을에서 안중근의 맏아들인 분도가 일제의 밀정에 의해서 독살 당해 죽게 되었다. 분도는 안중근이 그의 부인과 어머니에게 보낸 유서에서 신부로 키워달라고 부탁했던 아이였다. 안중근 가족은 1917년 7월 니콜리스크로 다시 이주하여 벼농사를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연해주는 러시아 혁명의 큰 물결에 휩쓸리고 있었다. 이 와중에서 연해주의 동지들은 안중근 가족의 보호에 특별히 유념해야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당시 동양최대의 국제도시였던 샹하이(上海)로 이주해갔다. 안중근 가족 일행이 상해에 정착한 때는 1919년 10월이었다. 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출범한지 몇 개월이 지나서였다.

그 가족의 샹하이 생활

샹하이로 이주한 안중근 가족들은 프랑스 조계 내 남영길리(南永吉里)에서 살았다. 그들이 살던 곳은 평안도 출신 서북지방 인사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했으며 흥사단의 샹하이 지부가 있던 선종로(善鍾路)나 기호지방 인사들의 거주지였던 애인리(愛仁里)와는 약간의 거리가 있었다. 안중근 가족의 샹하이 정착에는 도산 안창호가 일정한 도움을 주었다. 또한 구한말 1894년 동학농민혁명 직후부터 안중근의 부친인 안태훈과 잘 알고 지내던 백범 김구도 그들의 생활을 도왔다. 샹하이 시절 초기 어머니 조마리아와 안중근의 아내 및 자녀들을 전적으로 돌보아준 사람은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이었다. 그는 샹하이 시절 김구의 오른팔이 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1937년 일본군이 샹하이를 공격해 오자 자신의 가족들도 내버려둔 채 김구의 모친 곽낙원만을 남경으로 모시고 나왔다. 이 때문에 안공근은 백범 김구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기도 했다. 안공근의 이러한 행동은 후일 큰 후회거리를 남겼다.

안중근의 둘째아들 안준생(安俊生, 마태오)이 생장한 데는 이곳 샹하이가 되었다. 안준생은 이곳에서 수학했고, 샹하이의 가톨릭스쿨(진단대학?)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있었다. 그는 정옥녀(鄭玉女)와 결혼하여 2남1녀를 두었다. 중일전쟁 시 안준생은 중경으로 가지 못하고 샹하이에 남아 있었다. 그는 처가의 권유에 따라 헤로인 장사를 시작하여 일약 치부했고, 조선총독부의 초청을 받아 고국을 방문했다 한다. 그런데 당시 서울의 장충단에는 친일파 인사들에 의해서 이등박문을 추모하는 박문사(博文祠)가 세워져 있었다. 이때 안준생은 총독부의 계획대로 서울 장충단에 있던 박문사를 찾았고 ‘이등박문의 아들과 눈물의 악수 일 장면’을 연출했다. 이렇게 그는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길을 향해 가고 있던 일제의 침략정책에 동원되었고, 안중근을 아끼던 모든 사람들은 그 아들의 행위에 가슴을 쳤다.

남은말

안중근의 가족들에게 남편이요 아버지였던 안중근은 무엇이었을까? 안준생은 아직 핏덩이에 지나지 않았던 때에 아버지를 일제에 빼앗겨서 기억할 수 없었다. 그도 모든 이가 우러르는 아버지에 대해 사무치는 그리움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한편으로 그는 평범한 아들이 되어 아버지의 무심함을 원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원망이 그를 자포자기로 내몰았고, ‘눈물의 연출’에 참여하게 했으리라.

안중근의 맏딸 안현생은 샹하이에서 황일청(黃一淸)과 결혼하여 평범한 삶을 살았다. 맏아들 분도는 독살당했다. 안중근의 아내 김아려는 1945년 이전 샹하이에서 죽었다. 해방이 되었다. 그 둘째 아들은 해방된 조국을 보고 회한의 눈물을 흘렸을 게다. 안준생은 그렇게도 그렸을 조국에 몰래 숨어서 들어왔다. 그리고 부산에서 살다가 한국전쟁 때 해군 병원선에서 별세했다. 당시 대한민국 해군에는 그와 상해시절 알고 지냈던 손원일 제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안중근과 그 피붙이들은 겨레를 위해 순국했고, 독살당했으며, 고생 끝에 이국땅에서 숨을 거두거나 죄인이 되어 숨어지내다 죽어야 했다. 그러나 안중근의 혈족 가운데에는 11명이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았다. 그의 가족사는 우리 현대사와 현대교회사의 축소판이다. (이 기사는 <가톨릭인터넷언론-지금여기> 2008년 7월 7일자에 실렸던 것입니다) 

조광 (고려대학교 교수, 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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