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

한 달 전 그날, 오후 6시 개표방송과 함께 시작된 우울은 도무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유구무언, 입은 있되 말은 나오지 않는 그런 상태였다고나 할까. 기자인 주제에 그날 이후 TV와 신문을 비롯한 모든 매체를 외면하고 싶어졌다. 패배의 이유에 관한 분석들은 쓰라렸고, “신발 끈 동여매야 해. 우린 지켜야 할 것들이 있잖아”라며 애써 다독이는 격려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튕겨져 나갔다. “듣고 싶지 않다고!”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지구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잘만 돌아가는데 시간이 지나도 여전한 나를 보며 “역시 나는 찌질이 궁상이었어”를 되뇌기도 했다. 그래, 나는 절망했다.

절망 속에서 다시 만난 수천 년 전 팔레스타인의 그들

예전에 “암보다 무서운 것은 절망이에요”라는 어느 시인 수녀님의 기사를 읽었을 때 나는 절망을 ‘실망’으로 이해했었다. ‘일이 바라는 대로 되지 않거나 기대에 어긋나서 마음이 상함’이란 의미의 실망, 그랬다. 절망은 ‘희망이 완전히 없어져 체념하고 포기함’이란 의미였다.

절망을 경험하며, 아주 오래전 지금의 나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절망 속에서 그저 묵묵히 살아갔던 이들이 마음에 들어왔다. 비참한 포로의 삶을 살면서 “하느님의 통치가 곧 시작될 것”이라는 예언자들의 외침을 유일한 희망으로 버텨왔던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는 쉬이 열리지 않았다. 예언을 해도 해도 결국 좋은 세상이 오지 않아서, 그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또다시 새 세상을 말했다. “이 세상이 끝나고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고.묵시 문학은 절망 가운데 살아갔던 이들의 또 다른 희망이었다.

예수를 그렇게 떠나보내고 자신의 일상으로 향해야 했던 이들의 발걸음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꿈꾸던 모든 것은 끝장났다고, 이제 그저 입에 풀칠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 외에는 다른 삶의 방식이 없다고 여기며 고향을 향했던 이들 말이다.

 ⓒ박홍기

'우리'가 아닌 '나'에게 물어봐

그렇게 절망을 견디며 삶을 살아냈던 이들에게 한없는 경외를 보내며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벗들과 단 한 번의 조촐한 송년회를 했다. 하염없이 눈이 내리던 그날, 함께 하셨던 선생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보다는 ‘나’에게 묻는 게 중요하지.”

분명, 그렇게 물었다.
“우리가 뭘 잘못했니?”
“우리가 뭘 어떻게 더 해야 했니?”
“그들은 대체 왜 그런 선택을 하는 거니?”

질문은 ‘우리’와 ‘그들’ 사이에서 맴돌 뿐 ‘나’를 향하지 않았다. ‘우리’라는 안정감을 주는 경계 안에서 나의 정체성은 어느덧 사라지고 내가 져야 하는 책임은 n분의 1이 채 되지 않았다. ‘우리’로 있을 때에는 비난도 쉬웠다. 경계선 밖 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적(敵)이었고 따라서 아무런 책임감 없이 그들 탓, 그들 문제로 돌릴 수 있었다.

시선이 나를 향하자 질문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 되었다. “나는 왜 절망하는가?”

고백하건대 나는 튼튼한 뿌리로 살아오지 않았다. 동풍이 불면 부는 대로 서풍이 불면 부는 대로 가랑잎같이 가볍게 흩날렸다. 그래서였다, 절망했던 것은. 나는 쉽게 희망했고, 따라서 쉽게 절망했다. 민주주의는 말을 넘어 삶의 방식으로 더 깊이 내려오지 못했고 희망은 크고 막연해 구체적이 되지 못했다.

가볍게 살기를 바랐다. 하지만 진정 가벼운 삶이란, 무엇이 닥쳐와도 그것이 나를 스쳐 지나갈 수 있어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거센 태풍도 부드러운 산들바람도 나를 넘어뜨리는 위협이 아니라 그저 지나가는 바람이려면 뿌리가 깊어져야 한다는 것을, 나는 잊고 있었다. 뿌리 내리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뿌리 내리기 위해, 숨을 깊게 들이쉬며

지난 며칠간 새해맞이 단식을 했다. 한결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쌓아두었던 책들을 다시 펼쳤다. 마침 순환직인 편집 기자로 자리가 이동됐다. 보다 차분하게, 뛰어다닐 때 보지 못했던 세밀함을 기르는 시간이 되리라 기대하며 기사와 원고들을 읽고 손보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하늘 끝 땅 끝까지 뻗는 재크의 콩나무 뿌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매일 자고 일어나는 사이에 비밀스럽게 자라는 겨자씨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씨는 어떤 씨앗보다 작다. 그러니 순간에 충실하며 긴 호흡으로 먼 곳을 바라본다.

취재차 김근태 전 고문의 추도 미사에 갔을 때였다. 선거 패배 이후 가라앉은 분위기의 민주통합당 관계자들이 자리했고, 미사가 끝난 뒤 몇 인사의 추도사가 이어졌다. 그 날 강금실 변호사는 “김 선배(김근태 전 고문)가 고문당하면서 후배들의 이름을 말하지 않은 것은 사랑 때문이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야당 정부 10년을 지킨 것은 김 선배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김 선배는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라서 민주주의자 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말하는데 저는 먼저 제가 스스로를, 그리고 옆 사람을 사랑하는가, 내 마음이 오래 견디고 품어 주고 겸손하고 온유한가 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최근에서야 깨달았습니다. 나를 공격하는 이들에게 분노하고 공격을 되돌려주는 것을 정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어렵겠지만 김 선배가 보여주신 사랑의 길, 한번 가보겠습니다.”

단일화 이후 선거유세기간 동안, 민주 통합당 현직 의원들보다 더 열정적으로 전국을 돌며 문재인 후보를 위해 뛰었던 그였다. 대선을 앞두고 개인인터뷰를 위해 그의 변호사 사무실을 찾았을 때, 대한민국의 진보에 대해, ‘시민’에 대해 회의적이라 말했던 기자에게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한 명 한 명 끝까지 설득해야죠”라고 말했었다.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 했던가. 그렇다면 사랑이 절망도 몰아낼 수 있지 않을까. 자기 살던 집과 일터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나 꽁꽁 언 발로 거리에서, 송전탑에서 목이 터져라 싸우는 이들이 넘쳐나는 이 추운 겨울에 나는 다시 사랑의 길을 찾아보련다. 세상의 빛나는 것이라 믿었던 민주주의가 빛을 잃은 지금, 또 다른 ‘빛나는 것’인 사랑이 어둠을 몰아내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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