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의 역사의 창, 교회 6]

박해시대 교회사에서는 자신의 신앙을 용감히 실천한 많은 여성 신도들의 행적을 서술하고 있다. 그들은 순교하거나 유배당하는 것으로 신앙의 대가를 치렀다. 우리는 여회장 강완숙(姜完淑, 골롬바, 1769-1801)과 윤점혜(尹占惠, 아가타, ? -1801)의 활기찬 움직임을 통해서 새 시대의 조짐을 찾게 된다. 이순이(李順伊, 누갈다, 1781-1801)의 순결을 높이 평가하고, 그 밖의 많은 여성들의 순교를 기린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는 이 여성순교자 외에 자신의 신앙으로 말미암아 귀양을 가야했던 여성신도들의 존재가 확인된다. 이들의 삶은 우리 교회사의 한 장면을 이루고 있다.

신앙을 실천한 여성들

박해시대에 많은 여성들은 가정을 지키면서 자신의 신앙을 지켜가고 있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젊은 여성들이 그리스도의 참다운 배필이 되고자 하여 순결을 다짐하고 신앙을 지키며 살고자 했다. 이들은 자그마한 공동체를 무어서 천주교 신앙을 실천해 나갔다. 동정녀들 이외에 청상과부들도 함께 모여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사회에서 여성들의 동정생활은 이해될 수도 없었고 용납되지도 않았다. 이에 그들은 스스로 칭하기를 ‘허가(許哥)의 처(妻)’였다가 과부가 되었다고 하면서 스스로 댕기머리를 풀어 쪽을 지고 함께 살아갔다. 그들은 허무(虛無)한 세상의 자녀이지만 영생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자신을 ‘허가의 과부’라고 이야기했던 터였다. 그들이 허가(許哥)의 처라고 자칭할 때 그 ‘허가’는 성씨가 아니라 ‘허무’를 지칭하던 말이었다.

박해가 일어나자 이 ‘허가의 처들’도 모조리 끌려갔다. 성리학에 고착되었던 당시의 관념은 그들에게 천주교 신앙과 동정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심한 고문을 받고 신앙의 포기를 강요당했고, 자신의 신앙을 끝까지 고수하고자 했던 이들은 순교의 길을 걸었다. ‘허가의 처’라고 자칭하던 동정녀 정순매(鄭順每)는 자신의 고향 여주(驪州)로 환송되어 목이 잘렸다.

반면에 ‘허가의 처’ 이득임(李得任)처럼 고문에 못 이겨 신앙의 포기했던 이들은 귀양을 떠났다. 그는 전라도 장흥(長興) 땅에 귀양살이를 했다.

홍순이(洪順伊) 루시아도 천주교 신앙 때문에 귀양을 가야 했다. 그는 당시 대표적 여성신도였던 강완숙의 딸이며, 홍필주(洪弼周, 필립보, 1773 - 1801)의 누이였다. 루시아는 자신의 집에서 어머니가 주문모 신부를 모시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체포된 후 이 사실을 추궁하던 관료들로부터 어머니를 지켜주기 위해 “형벌을 참아가면서도 고하지 않았다.” 모든 사실들이 들통난 다음에도 그는 “엎드려 빌건대, 저를 죽여서 어머니와 오라비의 생명을 대속(代贖)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심문관에게 읍소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와 오라비는 순교하고, 그는 전라도 영광(靈光)으로 유배되었다.

이순이와 정명련의 삶

1801년의 박해에서 우리는 두 여성의 삶과 죽음을 대비하여 살펴볼 수 있다. 그 하나는 동정부부 이순이(李順伊)의 순교이고, 또 다른 하나는 황사영(黃嗣永)의 처 정명련(丁命連, 마리아, 일명 정난주)의 삶이다. 이순이는 서울의 명문 양반집의 규수였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배필이 되어 동정생활을 하고자 했다. 이순희는 친척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중철과 부부처럼 결혼했지만, 결혼 후 순교할 때까지 4년 동안 남매처럼 지내면서 동정생활을 했다. 이 동정생활을 통해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반려자가 되고자 하던 수도자적 신앙을 실천했다. 그리고 이로써 그들은 당시 성리학적 사회 관습을 통렬히 거부해 나갔다.

이순이는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표현된 바와 같이 “이 역사의 가장 감동적인 인물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유항검과 유중철에 연좌되어 평안도 벽동(碧洞)에 관비(官婢)로 충정당했다. 그는 자신이 순교자가 되지 못하고 관비로 전락되는 것을 무척 억울하게 생각했다. 그는 귀양길을 떠나면서 줄곧 신앙을 고백하며 순교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의 소망은 채워졌고 그는 순교자가 되어 ‘순교와 동정이라는 이중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한편, 또 다른 순교, 살아서 매번 견뎌야 하던 순교가 있었다. 황사영이 신앙 때문에 처형된 이후 그의 가족은 풍비박산되었다. 그의 어머니 이윤혜(李允惠)는 경상도 거제도로 귀양을 가서 관비(官婢)가 되었다. 그의 어린 아들은 전라도 영암 땅 추자도에 노비로 보내졌다. 그의 처 정명련(丁命連, 마리아)은 제주도 대정현에 귀양가서 관비가 되었다. 그는 시대를 주름잡던 지식인 다산 정약용의 친조카딸이었다. 그는 명문 출신의 귀염받던 새악씨였고, 두 살배기 젖먹이 황경한(黃景漢)의 어미였다. 정명련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어린 아들을 추자도에 때어놓고 귀양지 제주도로 가야만 했다. 이순이는 죽었지만, 정명련은 남편과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그곳에서 평생을 관비로 살아야 했다.

귀양지에서의 여성 신도들

조선왕조에서 여성 범죄자들은 흔히 지방에 유배당해 관비(官婢)로 충정되었다. 중요한 범죄자의 어머니나 처첩들 그리고 출가하지 않은 딸들도 연좌에 걸려 관비가 되어 지방으로 쫓겨났다. 조선왕조에서 관비는 무슨 일을 했을까 ? 관비들은 지방 관청의 허드렛일을 맡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해야 했던 가장 보편적 역할을 ‘방지기’였다. 방지기란 중앙에서 파견되어 잠시 다녀가는 하급관원이나 군관들과 동거하면서 그 일상생활에서 편의를 제공해 주던 존재였다. 이렇게 관비들은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지방관의 명령에 따라 뭇 남성의 객고를 풀어주는 노리개가 되어야 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천주교 신앙 때문에 지방에 귀양가서 관비가 되었던 많은 여성신도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들 중에는 ‘허가의 처’라고 자칭하면서 그리스도의 배필로서 평생 동정을 지키고자 했던 갸륵한 처녀들도 있었다. 당당한 양반집 규수로 지내던 여성들도 하루아침에 방지기가 되어 지방 현지의 위안부로 전락해갔다. 이들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으며, 계속되는 순교의 삶일 수도 있었다.

1866년의 박해 때에 순교한 남종삼(南鍾三, 1817-1866) 성인의 부인 이조이〔李召史〕와 두 딸은 남종삼이 사형을 당한 이후 관비가 되어 끌려갔다. 그러나 남종삼 성인의 부인이 관비로 유배된 경상도 창녕(昌寧)에는 마침 남종삼과 동문수학하던 사람이 지방관으로 있었다. 이 때문에 이조이는 그 지방관의 보호로 방지기의 신세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그와 같은 행운이 다른 여성 신도들에게도 있었다는 사실을 듣지는 못했다.

천주학장이 출신 방지기 가운데에는 그 신고로운 삶 속에서도 신앙의 불씨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또 다른 우리 자매들은 그 고통스런 삶 때문에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신앙을 증오하고 저주하기도 하였으리라.

남은 말

자신의 신앙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많은 여성 신도들이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귀양갔다. 하느님의 배우자로 살고 싶었던 여인들, 정절을 목숨보다 귀하다고 배워 온 조선의 여성들이 신앙 때문에 관비로 살아갔다. 어쩌면 그것은 여러 순간 목숨을 내놓는 순교였을 것이다. 우리는 이들에 대한 생활과 신앙을 좀 더 많이 알고 기억해야 하리라.

오늘의 우리는 동정녀 이순이 누갈다를 아끼며 그의 순교를 높이 받든다. 그의 순결과 굳은 신앙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범이 되기 때문이다. 그에 있어서 순교는 분명 하느님의 은총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나라 땅 끄트머리에서 방지기로 하마 전락하였을 정명련 마리아의 고통과 고뇌를 생각해야 한다. 아마도 정 마리아는 여성으로서의 자존심과 정절을 잃을 수밖에 없었겠지만, 어쩌면 그 고통의 삶에도 하느님의 숨은 뜻이 있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명련은 분명 자랑스런 우리 신앙의 선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순이의 순결과 함께 정명련을 비롯한 여성신도 관비(官婢)들의 고통과 절망까지도 사랑해야 한다. 그 방지기들의 고통과 절망을 끌어안을 때 우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순이의 순교가 장한 행동이었다면, 신앙 때문에 방지기가 되어야 했던 이들의 삶도 장하기 그지없기 일이었다. 그 방지기 여성신도들의 고통을 우리가 기억하는 한, 오늘의 여성들이 교회 안에서 직면하고 있는 또 다른 고통과 희망을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조광 고려대학교 교수, 사학 2008-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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