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0일 (연중 제2주일) 요한 2, 1-11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갈릴래아 가나 동네의 한 잔칫집에서 물을 술로 변하게 하신 이야기였습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이 이야기를 전혀 보도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서는 그것이 예수님이 일으킨 첫 번 표징(標徵)이었으며, 이 일로써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서가 ‘영광’이라고 말할 때는 하느님의 일을 드러내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 복음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아버지로부터 오시어 은총과 진리로 충만하신 외 아드님의 영광을 보았다.” (1,14). 예수님 안에 은혜롭게 나타난 하느님의 일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이야기가 알리는 하느님의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술이 떨어진 잔칫집에서 물을 술로 바꾸셨습니다. 여기에 하느님이 하시는 은혜로운 일을 보라는 말입니다. 복음은 이 일이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결정적 계기였다고 말합니다. 유대교 신자였던 제자들이 유대교를 떠나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된 결정적 요인이 이 이야기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잔치에 술이 떨어졌다는 말로써 시작합니다. 잔치는 기쁨을 나누는 행사입니다. 그래서 잔치에는 늘 술이 있습니다. “술은 인생을 즐겁게 한다.”고 구약성서(코헬 10,19)는 말합니다. 술이 떨어지면, 잔치는 따분하고 곤혹스러울 것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유대교가 바로 그런 잔치였다고 말합니다. 마태오복음서의 표현을 빌리면, 유대교는 “무겁고 힘겨운 짐들을 묶어 사람들의 어깨에 지우고” 그 지도자들은 “그것을 나르는 데 손가락 하나 대려 하지 않습니다.” (마태 23,4) 율사들은 복잡한 율법조항들을 만들어놓고, 지키라고 강요합니다. 사제들은 온갖 구실을 만들어서 제물 봉헌을 강요합니다. 율사와 사제 이 두 부류(部類)가 그 시대 유대교의 실세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거나, 제물봉헌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을 모두 죄인으로 매도하였습니다. 따분하고 불안감을 조성하는 종교였습니다.

유대교는 하느님이 사람들과 함께 계시다는 모세의 체험을 근본으로 시작하였습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방과 기쁨을 체험하게 하였습니다. 그 믿음으로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신뢰하면서 이집트의 종살이를 청산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대장정(大長征)을 감행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교는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라는 신앙의 핵심을 잊어버리고, 지킬 것과 바칠 것에만 매달렸습니다. 이런 현실을 오늘 복음은 술이 떨어진 잔치라는 상징(象徵)으로 설명합니다. 잔치에 술이 떨어져 모두가 따분하고 곤혹스러울 때, 예수님이 나타나서 술을 공급하여 잔치를 기쁨의 장소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되찾아주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그리스도 신앙은 계명을 지키고 제물을 바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지키고 바치는 것은 종이 주인 앞에 하는 일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대들을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습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대들을 벗이라고 불렀습니다.”(15,15).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의 뜻을 모르고 순종만 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알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그대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대들은 내 사랑 안에 머무시오.”(15,9). 예수님의 제자인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이 베풀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자기 스스로도 베풀고 사랑하는 일 안에 머물러서 하느님의 일이 역사 안에 실현되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일입니다. 신앙인은 그 사랑 안에서 해방과 기쁨을 맛보고, 이웃에게도 그 사랑을 나눕니다. 인간 마음의 한 구석에는 종살이를 즐기는 노예근성이 있습니다. 생각하고 결단해야 하는 고뇌, 곧 머리 쓰는 일은 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만 하며 살겠다는 노예근성입니다.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애완동물이 되어 살겠다는 것입니다. 재물이 좋으면, 그것만을 섬기겠다고 사생결단 나서기도 하고, 권세에 맛 들이면, 온갖 추태를 부리면서도, 그것을 향해 뛰는 주구(走狗)가 되기도 합니다. 모두 불쌍한 우리의 모습들입니다. 신앙인은 인간을 종으로 전락시키는, 잘못된 인간의 근성들을 청산하고, 새롭게 살겠다고 세례에서 약속하였습니다. 신앙인은 재물도 권력도 이웃을 돕고 이웃을 사랑하는 계기로 삼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느님의 자유를 살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셔서 신앙인이 맛보는 해방과 기쁨은 고통과 재해에서 면제되어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고통과 재해를 겪듯이, 신앙인도 같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절망적 어려움 앞에서도, 하느님을 향한 희망으로 기도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죽음에 이르듯이, 신앙인도 언젠가는 세상을 하직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죽음의 절망 앞에서도, 하느님을 부르면서 희망을 가슴에 안고 이 세상을 떠나갑니다. 신앙인은 베풀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합니다. 비록 그 실천이 보잘것없는 것일지라도, 신앙인은 그것으로 하느님을 향해 자기가 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이 은혜롭게 베푸셨다는 사실에 시선을 빼앗긴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자기가 받은 생명, 가족, 재능, 재물, 지위 등 모든 것을 하느님이 베푸신 은혜로운 것, 이웃을 위해 나눌 수 있는 풍요로운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일이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자유를 누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에게는 행복과 기쁨이 있습니다. 신앙인은 자기가 받은 것을 주변 사람들과 나누어서, 베푸시는 하느님의 일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합니다.

우리에게도 하느님이 과연 은혜로운 분이신지, 또 우리의 이웃은 우리가 그 은혜로움을 함께 나누는 대상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사람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복음서들이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 시키는 대로 하라는 말씀으로 우리에게는 들립니다. 지키고 바치겠다는 종의 근성에서 먼저 벗어나야 합니다.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해방과 기쁨을 나누는 잔치에 초대받은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은 은혜로운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이 베풀어주신 우리의 삶입니다. 해방과 기쁨을 찾아서 우리의 삶을 꾸며야 합니다. 그리고 각자 자유롭게 그 삶을 잔치로 만들어야 합니다. 은혜롭게 베풀어진 나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이웃과 나누어서 함께 기뻐하는 계기가 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1964년 파리에서 서품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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