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의 역사의 창, 교회 4] 선교사와 평신도가 맺은 우정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벗을 사귀게 되고, 벗과 벗 사이에는 따뜻한 마음이 오고간다. 우리는 이 따뜻한 마음을 우정이라고 한다. 우정을 나누는 데에는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벗들에 대한 기본적 신뢰와 상호간의 존경심과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다. 이 마음으로 서로를 대할 때 그 우정은 더욱 커 갈 수 있으며, 벗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걸 수 있게 된다. 사랑의 극치는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행위이다. 우리 교회사에 보면 이와 같은 우정의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박해시대에 피어난 프랑스인 선교사와 조선인 신도 사이의 우정은 박해시대 교회사가 만들어낸 역사의 명장면 가운데 하나이다.

 

1855년 충청도 배론에 신학교가 세워졌다. 이 신학교에는 뿌르띠에 신 신부와 쁘띠니콜라 박 신부가 주재하면서 신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 학교는 늙은 회장 장주기 요셉이 명목상의 주인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1866년 박해의 불길은 이 배론 신학교도 휩쓸어 갔다. 박해의 과정에서 두 신부가 체포되었고, 집 주인이었던 장기주도 체포되었다. 장주기는 감옥에서라도 선교사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을 돌보아야겠다는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선교사들을 차마 그대로 떠나보낼 수 없었다. 그러나 뿌르띠에 신부는 포졸들에게 이야기 했다. ‘불쌍한 이 노인을 어떻게 하려는 거요. 제발 자기 발로 걸어서 무덤에 들어가게 내버려두시오’라고. 뿌르띠에 신부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몸에 지니고 있던 얼마간의 돈을 포졸들에게 주었다. 장주기 요셉은 즉시 풀려났다.

다음날 포졸들은 선교사들 데리고 서울로 향해 출발했다. 소를 타고 멀찌감치 두 신부의 뒤를 따라가던 장주기를 보자 신부들은 포졸들을 꾸짖었다. ‘당신들은 이 노인을 그냥 놓아 준다고 약속하지 않았소. 그러니 저 노인을 돌려보내도록 하시오’. 그러자 포졸들은 장주기를 쫓아 보냈다.(A.M.E. Vol.579, f.1238 ; Notice du martyr de Chang Joseph) 장주기는 마지못해 신학교로 돌아와 닷새 동안 머물렀다. 그러다가 배론에서 30리쯤 떨어진 노럴골에 살고 있는 어느 교우집으로 옮겨 갔다. 그곳에서 그는 또 체포되어 제천 현감에게로 끌려갔다. 그리고 서양선교사들의 집주인이었다는 전력 때문에 서울로 이송되어 그가 지켜주고자 했던 뿌르띠에 신부와 쁘띠니꼴라 신부처럼 순교했다.

장주기가 체포당해 압송되어 가던 두 신부를 뒤쫓아 가고자 했던 까닭은 그들에 대한 존경심 때문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당시의 열심한 신자들처럼 순교자가 되고자 하던 원의가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쁘르띠에 신부가 포졸들에게 돈을 찔러주며 장주기를 풀어달라고 했던 까닭이나, 장주기가 압송되어 가는 선교사의 뒤를 따라 가고자 했던 다른 이유는 그들 사이에 형성되어 있던 인간에 대한 신뢰와 존경 즉 우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훗날 장주기는 성인품에 올랐다. 그러나 그가 지켜주고자 했던 두 신부는 시복 시성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성인과 우정을 나누었던 그 두 신부는 정말 행복한 사람들이었다.

다블뤼 주교와 황석두 루까

1866년의 박해는 신자와 선교사간의 우정을 나타내는 또 다른 사례를 제시해 주고 있다. 우리는 다블뤼 주교와 황석두 루까의 경우에서 이를 확인하게 된다. 황석두는 집안의 갖은 방해를 무릅쓰고 천주교 신앙을 실천했다. 그는 페롱 신부와 조안노 신부 그리고 베르뇌 주교를 도와 전교회장의 일을 하고 있었다. 그 후, 양반 출신으로 상당한 학식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다블뤼를 도와 교회서적의 저술과 출판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1860년대 전반기에 간행된 여러 한글 천주교 서적들은 거의가 그의 손을 거쳤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1866년 3월 11일 다블뤼 주교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을 때 황석두는 자신의 운명을 다블뤼 주교와 함께 하고자 했다. 주교는 그에게 안전한 곳으로 피하라고 말했지만, 황석두는 이를 거부했다. 다블뤼 주교의 요청을 받은 포졸들도 황석두에게 따라오지 말라고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황석두도 다블뤼 주교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들은 사형선고를 받고, 충청도 보령 갈매못으로 끌려가서 형이 집행되었다.

황석두 루까가 다블뤼를 떠나서 자신의 살 길을 찾지 않았던 까닭은 어디에 있었을까? 물론 그들은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던 신앙을 같이 하는 사이였다. 그들은 자신의 지성으로 체포된 자신들의 앞길을 내다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블뤼와 그 사이에 존재하던 상호존중과 우애의 감정은 신앙으로 맺어졌던 그들의 연대를 더욱 굳게 해 주었다. 황석두 루까는 이러한 여러 이유들이 복합되어 다블뤼 주교를 따라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해나갔다.

박상근과 깔레의 우정

경상북도 문경군 문경읍 마원1리에 가면 순교자 박상근 마티아의 묘가 있다. 지금은 성지로 가꾸어진 이곳에는 프랑스 선교사와 조선인 신자 사이에 맺어진 또다른 우정의 장면이 새겨져 있다. 때는 1866년의 박해시대였다. 박해의 여파가 경상도에 미쳐 한실에 거주하던 깔레 신부는 문경의 아전이었던 박상근 마티아에게로 피신해 갔다. 깔레가 박상근을 택해서 피신하고자 했던 데에는 아마도 그들 사이에 신뢰와 존경에 기초한 일종의 우정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깔레 신부는 사람들에게 발각되었다. 박상근과 깔레는 허겁지겁 집을 나와서 소백산맥의 첩첩산중을 헤매게 되었다. 풀뿌리로 배를 채우고 시냇물로 목을 축인 깔레 신부는 자신이 박상근에게 큰 짐이 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방 고을의 아전 자리에 있던 그는 집에 돌아가면 충분히 살아남을 방안이 있을 터인데도 외국인 선교사인 자신과 함께 다니다가 잡히면 틀림없이 죽게 되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벗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칠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깔레 신부는 박상근에게 자신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했다. 그러나 박상근은 이를 마다하고 한사코 같이 가야한다고 말했다. 길이 설고 생김새가 다른 선교사를 홀로 가게 하면 곧 잡히게 되거나 굶어 죽게 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깔레 신부는 강한 어조로 결단을 내려 박상근에게 ‘신부의 말에 순종하시오’라고 명했다. 그리고 깔레는 박상근의 손을 감싸 쥐어주고서는 산길을 택해서 내닫듯이 사라졌다. 산길에도 어둡고 얼굴 생김새도 다르니 틀림없이 죽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생각되는 길이었지만 깔레는 용감하게 박상근을 떨치고 일어섰다. 떠나는 그를 보며 박상근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 수밖에 없었다.

박상근 마티아는 깔레 신부와 헤어진지 몇 달 후 그의 숙모 홍마리아와 함께 체포되어 순교했다(치명일기 814번). 깔레 신부는 그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죽음을 무릅쓰고 그를 떨쳐냈지만, 그는 경상도 교우촌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잡혀서 순교의 길을 걸게 되었다. 아마도 죽음을 각오하고 깔레 신부와 함께 하고자 했던 선교사에 대한 그의 깊은 우정이 그를 순교자의 대열로 인도했으리라.

깔레 신부는 그후 또 다른 신자의 도움을 받아서 용하게 살아남아 충청도 해안가에 이르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살아남은 세 명의 선교사와 함께 배를 타고 중국으로 피신하여 살아남았다. 그리고 깔레는 그곳에서 자신을 떠나보내야 했던 박상근의 이야기를 글로 남겼다. 그후 깔레는 곧 조선에 다시 입국하여 선교하고자 노력하였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이에 그는 프랑스로 돌아가서 트라피스트 수도회에 입회하여 봉쇄수도원의 수도자로서 자신이 선교했고 자신의 동료들이 피를 흘린 조선을 위해 평생을 기도하며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선교사와 평신도, 우정을 낳는 관계

훈장 출신이었던 정의배 마르코 회장은 1866년의 박해 때에 감옥에 갇혀서 회장의 도움이 절대로 필요하게 된 브르트니에르 백신부를 차마 버려두고 떠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몸을 피하기를 포기하고 선교사와 함께 하는 길을 택했다.(A.M.E. Vol.579, f.1234. Calais, Notice sur le Martyr de Cheng Marc) 이는 또한 그가 가지고 있던 우정의 표현이기도 했다. 선교사와 신자 사이에 맺어졌던 우정의 존재는 우리나라 교회사를 이해하는 데에 새로운 안목을 제시해 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원래 우정은 인간으로써 서로 평등하다는 의식이 있어야 비로소 성립된다. 서로를 인간으로 인정하고 서로의 존엄성을 나누고자 할 때, 벗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도 있는 진정한 우정이 생겨난다. 만일 선교사들이 조선인을 야만에 가까운 하잘것없는 인간으로만 보았다면 거기에서 우정은 자리 잡을 수 없다. 또한 조선인 신자들이 선교사를 자신과는 합치될 수 없는 부류로 판단했다면 거기에서도 우정은 더이상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박해시대의 여러 사례를 볼 때 선교사와 신자 사이에는 우정에 가까운 여러 특성들을 이상에서처럼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지배와 예속의 관계만은 아니었다.

/조광 고려대학교 교수, 사학 2008-05-18

뿌르띠에 신부와 장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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