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파노라마-6]

 451년 칼케톤 공의회(Council of Chalcedon)에서 알렉산드리아의 디오스코로스 주교가 파면된 이래로 로마 가톨릭 교회와 차갑게 결별을 고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걸어온 이집트 콥트 교회의 지난한 역사를 그대로 반영해주기라도 하는 것일까. 에티오피아에서 온 순례자들과 함께 다시 방문한 누비아 박물관의 드넓은 전시실 안에서는, 일군의 콥트교 성화들이 암울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비탄의 메시지를 한껏 토로하고 있었다.

1997년 유네스코의 원조로 개관한 아스완 누비아 박물관은, 선사시대부터 이슬람 시대에 걸친 누비아 지방의 유물들을 역사와 풍속 위주로 광범위하게 전시하고 있다. 희미한 조명등 불빛 아래서, 어디선가 마태수난곡이 하염없이 울려 퍼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환청으로 전해 들으며, 이슬람 시대의 유물들과 함께 전시되어있는 콥트교 성화와 유물을 차례로 관람해 나갔다. 이집트의 자생적인 기독교 분파로, 초기 기독교 시절부터 이집트를 중심으로 에티오피아, 아르메니아, 시리아 등지에서 면밀히 교세를 유지해 온 콥트교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이집트인을 지칭하는 ‘아이깁티오이(Aigiptioi)’에서 파생한 아랍어 ‘킵트(Kibt)’ 혹은 ‘쿱트(Kupt)’에서 유래한다.

▲ 아스완 누비아 박물관, 초기 콥트교 성화(聖畵) ⓒ수해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신인양성론(神人兩性論)에 반기(反旗)를 들고, 그리스도의 인성보다 신성의 측면을 강조하는 단성설을 주장하면서 로마 가톨릭 교회와 정면으로 충돌한 이래로, 이집트만의 교황을 독자적으로 선출하고 있는 콥트교도들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원형을 매우 엄격하게 보존해오고 있다. 지금도 오른쪽 손목 안 중앙 부위에 하늘색 십자가 문신을 새기며, 그들만의 독창적인 기독교 공동체의 결속력을 돈독히 강조하는 콥트교인들의 자긍심은 실로 대단해 보였다.

천천히 에티오피아에서 온 순례자들과 함께 ‘누비아 기독교의 변천’이라는 주제로 전시된 콥트교 성화들을 눈여겨 살펴보노라니, 언젠가 독일 베를린 달렘 미술관에서 보았던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 저절로 연상되었다. 현란하지 않게 차분히 가라앉은 노란 채색바탕에 그려진 서역(西域)의 네스토리우스교(Nestorianism)성화는, 지금 보고 있는 이 콥트교의 성화들과는 너무나도 다른 느낌을 주었다.

20세기가 배출한 저명한 ‘실크로드 탐험가’ 혹은 ‘파렴치한 도굴꾼’ 가운데 한 명으로 알려진 독일인 알베르트 폰 르콕(Albert Von Le Cop, 1860~1930)에 의하여, 중국 투루판 동쪽에 있는 카라호자에서 출토된 네스토리우스교의 벽화는, 부활절 직전 일요일인 종려주일(Palm Sunday)에 예수 그리스도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길가의 무리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축하하는 모습을 세밀하게 그려놓은 그림이다.

▲ 베를린 달렘 미술관, 네스토리우스교 성화(聖畵) ⓒ수해

431년 에베소 공의회(Councils of Ephesus)에서, 당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구별하는 이성설(二性說) 가운데, 네스토리우스파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면서, 또 다른 단성설의 선례를 보여 주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적인 측면만을 유독 강조한 나머지, 마리아에게 결코 ‘테오토코스(Theotoskos,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붙일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치던 교주 네스토리우스가 면직되어 아라비아 사막으로 추방당한 뒤, 내리 변방(邊方)사역의 길을 걸어온 네스토리우스교의 역사도 콥트교의 역사만큼이나 순탄하지 않은 길을 걸어왔다.

한동안, 베를린 달렘 미술관의 르콕 컬렉션 가운데, 서역에서 출토된 실크로드의 다채로운 그림들 속에서 발견했던 매우 따뜻하고 밝은 느낌을 주었던 네스토리우스교 성화와, 지금 눈앞에 마주하고 있는 암울한 분위기의 콥트교 성화들을 대조해보는 동안, 서서히 머릿속으로 등장하는 아주 작고 구슬픈 영상이 하나 있었다. 바로, 여태까지 보아온 수많은 성상(聖像)가운데, 나에게 가장 인상 깊게 다가왔던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다.

전승하는 기록에 의하면, 성모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 사후 예루살렘에서의 기독교 박해를 피해 사도 요한과 함께 터키로 건너와, 고대의 항구도시였던 에베소 인근 크레소스 산(Mt. Korssos)의 남쪽 기슭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선종(善終)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항간에서는, 현재 예루살렘 성벽 동쪽 언덕과 올리브 동산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키드론 골짜기에 있는 무덤이야말로, 마리아가 생의 마지막을 회향한 곳이라고 하는 이설(異說)도 분분하다.

▲ 에베소 크레소스 산, 성모 마리아의 집 ⓒ수해

그러나 어찌 되었던 간에, 거의 비슷한 크기의 편암(片巖)을 정교하게 층층이 쌓아올려서 만든 아담한 토담집의 어둡고 협소한 감실(監室)안에서 떨리는 가슴으로 조우(遭遇)했던 그 작은 성모 마리아상은, 어쩌면 에큐메니컬(Ecumenical)정신과 철저히 위배되어 보이는 니케아(Nicaea)와 에베소, 혹은 칼케톤의 이름으로 거론되었던 수많은 공의회의 논리적인 반목(反目)을 넘어서, 어디에도 치우침 없는 보편(普遍)의 원리를 표방하는 가톨릭(Catholic)의 순수한 정신을 담고, 한없는 연민의 시선으로 마음이 어리석은 이들의 철없는 행동을 묵묵히 굽어보고 있었다.

사랑과 미움이 날실과 씨실이 되어서 엮어온 기독교(종교)의 지난한 변천사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전시실 안의 콥트교 성화들을 차례로 둘러본 후에 밖으로 나오자, 드넓은 박물관 정원 한쪽에 인공으로 조성된 수로(水路)옆의 꽃나무 그늘 아래 모여서, 차담을 나누고 있던 에티오피아 순례자들이 반갑게 손을 흔들며 나를 불렀다.

이집트 전통차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놀랍게도 그네들의 다음 순례 여정이, 내가 이집트에서 걸어가려고 하는 여정과 거의 유사했다. 아스완에서의 여정을 마친 뒤, 에티오피아의 순례자들은 오늘 저녁 밤 기차로 카이로로 향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콥트교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카이로에서 이집트 교황청과 초기 기독교 유적지를 차례로 탐방한 뒤, 알렉산드리아를 최종목적지로 삼고 있다고 하면서, 나에게도 계속 동행을 하기를 권했다.

내내 눈앞에 어른거리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에 관하여서 묵상하다가, 갑자기 정신을 바짝 차리고 에티오피아 순례자들의 남은 여정에 귀를 기울였다. 자세히 들어보니, 그들은 지금부터 그리스도 사후 64년경에 이집트에서 순교(殉敎)한 마가 요한의 순교현장이자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된 최초의 장소이기도 한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마가 기념교회’와 ‘마가 요한 순교 기념탑’ 앞에서 미사를 봉헌할 예정이었다. 또한, 그 후로는 곧장 시나이 반도로 향한다고 했다. 그런데, 시나이 반도 이후의 여정은 마치 나의 노트를 훔쳐보기라도 한 듯이, 거의 꼭 같았다. 아휴~.

듣고 보니 망설이고 말고 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미안하지만 단번에 거부 의사를 밝혔다. 나는 감성적인 특질상, 그 누구와도 절대로 하루 이상 코스는 동행하지 못한다. 그리고 아직 아스완에서 둘러보아야 할 곳이 몇 군데 더 남아있었기 때문에, 공연히 인정에 이끌려서 섣불리 동행했다가는, 분명히 후회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 수몰 위기에서 건져 올린 이시스 신전 ⓒ수해

아부심벨 신전과 함께, 수몰 위기에서 건져 올린 또 하나의 놀라운 역사(役事)로 알려진 필라에 섬의 이시스 신전(lsis Temple)을 이전해 놓은 아기르키아 섬으로 가기 위해, 다시 아스완 선착장으로 향하는 길. 헤어지면서 선물로, 에티오피아의 눈빛 맑은 순례자들에게 내가 평소 홀로 길을 걸으면서 즐겨 암송하는 13세기 아랍의 대표적인 신비주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이븐 아라비(Ibn Arabi, 1165-1240)의 시 ‘사랑의 카라반’을 낭랑히 읊어주었다. 그리고 빌었다. 모쪼록 이 시에 담긴 메시지가 국경을 초월한 생명의 만트라(眞言)가 되어서, 반목과 질시로 얼룩진 어두운 세상 구석구석을 밝히며, 온 누리에 그윽이 퍼져 나가기를.

                                                             사랑의 카라반

                                                  이븐 아라비(Ibn Arabi)

 예전에 나는 내 자신의 종교와 가깝지 않은
다른 종교들을 거부했다.
이제야 나는 모든 형태의 종교를 받아들일 수 있다.

내 가슴은 가젤 영양이 머무는 목초지이며,
기독교 성직자들의 수도원이고,
이교도 신의 신앙이 서있는 사원이기도 하며,
무슬림 순례자들의 성지인 카바이기도 하며,
유대교 경전인 토라이며 꾸란 경전이기도 하다.

나는 사랑의 종교를 따른다.
사랑의 카라반이 어떤 길을 택할지라도
그것이 나의 길이며 종교이다.

 
 
수해 (기행문학가)
운문사 강원을 졸업하고, 오랫동안 세계 여러 나라의 명상사원과 문화유적지를 순례하다가, 동국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지은 책으로 시집《산 두고 가는 산》과 동아시아 기행 에세이《예정된 우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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