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3일 주님세례대축일 : 루카 3,15-16. 21-22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축일을 마지막으로 성탄시기를 마감하고 연중 시기를 시작합니다. 주님 세례 축일은 지난주에 거행한 ‘주님공현 대축일’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본래 주님 세례 축일은 주님 공현 대축일과 더불어 거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축일은 13세기에 이르러 교회 안에서 널리 거행되기 시작했지만,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년) 전례력에서는 ‘주님 세례 축일’을 별도로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 주님의 세례 (지오토 디 본도네 作, 프레스코화 1305년)
오늘날처럼 주님 세례 축일을 주님 공현 대축일과 별도로 거행하게 된 것은 1955년 교황 비오 12세(재위 1939-1958년)에 의해서 입니다. 이후 1960년 교황 요한 23세(재위 1958-1963년)는 이 축일을 교회의 공식적인 축일로 승인함과 동시에 1월 13일에 지내도록 규정했습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이 1월 6일이니, 그 일주일 후에 이 축일을 거행토록 한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 세례 축일은 전례력에 대한 개혁을 단행했던 교황 바로오 6세(재위 1963-1978년)는 1969년 이 축일을 1월 6일 이후의 첫 주일에 거행토록 했습니다. 다만 주님 공현 대축일이 1월 7일 이후의 주일에 거행되는 경우에는 그 다음날(월요일)을 주님 세례 축일로 지내도록 규정함으로써 오늘날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동방교회에서는 주님 세례 축일을 ‘테오파네이아’(θεοφάνεια, 하느님의 출현)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테오, θεο)께서 자신을 세상에 ‘보여주신’(파네이아, φάνεια) 날이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뜻하는 라틴어 '밥티스무스'(Baptismus)는 그리스어 '밥티스마'(βάπτισμα)에서 유래했습니다. '밥티스마'의 뜻은 이미 세례에서 드러났듯이 '씻음'을 의미합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 단어가 예수 시대의 유대인들에게 매우 생소했다는 점입니다. 미국의 조직신학자 루이스 스퍼리 채퍼(Lewis Sperry Chafer)는 자신의 저서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에서 이 '밥티스마'라는 단어가 신약성경에 사용될 당시, 이 단어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거의 신조어와 다름없었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의 정결례는 씻는 예식이 아닌 할례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을 접합니다. 주님의 세례는 예수께서 자신의 신원을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드러내시는 사건이며, 동시에 당신의 사명을 시작하는 공생활의 선포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주님 세례 축일에 보통 우리가 받은 세례(洗禮)의 의미를 되새깁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며, 우리의 지난 모든 죄, 즉 원죄(原罪)와 본죄(本罪)가 모두 씻겨 진다고 배웠습니다.

또한 가톨릭교회의 전통은 비록 세례를 받지 않았어도 주님 때문에 고난을 당한 사람들도 이미 세례를 받은 이들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를 교회는 '피의 세례'(血洗, Baptismus sanguinis)와 '불의 세례'(火洗, Votum Baptismi)로 칭하며, 성사가 아니면서도 세례의 효과를 낳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258항 참조). 그렇다면 과연 우리에게 세례의 의미가 꼭 '죄'와만 관련되어 있는 것일까요?

주님 세례 축일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셨던 장소인 요르단 강에 주목해봅니다. 요르단 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여정에서 마지막 장애물로 등장했던 곳입니다. 성경은 모세의 인도 아래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마른 땅"(출애굽 14, 22)처럼 건넌 것과 같이, 여호수아의 지도로 요르단 강을 "마른 땅"(여호 4,22)처럼 건넜다고 증언합니다. 즉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셨던 요르단 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만난 마지막 장애물이자, 동시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해 그 장애물을 제거하신 장소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당신의 신원을 세상에 처음으로 드러내는 장소로 요르단 강을 선택한 이유는 앞으로 자신이 대면할 수많은 장애물들의 예형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구원과 생명으로 들어가기 위한 마지막 장애물이자 관문으로 향하는, 세례 후에 이어질 자신의 공생활에 담긴 의미를 그렇게 드러낸 것입니다.

인간의 삶을 법률적 틀 안으로 가두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그리고 인간의 모든 행위를 종교적 관점에서 재단하려는 대사제들을 비롯한 당시의 종교인들과의 마찰은 예수의 공생활 전반에 걸친 장애물로 작용했습니다. 그리고 그 장애물에 의해 수난을 당하시고 죽음을 맞이했지만, 결코 그 죽음에 굴복하지는 않으시고 부활로 이겨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등장하는 요르단 강은 우리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겪었던 그 사건이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이 자리, 우리 삶 안에서도 살아 숨 쉬는 역사임을 일깨워줍니다. 우리가 세례를 통해 받은 것은 '죄의 씻음' 뿐만이 아니라,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선포하는 그리스도인의 소명이며, 그리고 바로 그 세례를 통해 우리는 삶 안에서 극복해야 할 수많은 장애물, 즉 요르단 강을 만나고, 요르단 강가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예수 그리스도 또한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세례 성사로써 우리가 구원의 길로 들어섰음을 선포합니다. 하지만 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운 생명에 참여했다는 것을 의미할 뿐, 세례의 완성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세례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 예수께서 걸으셨던 자유와 해방의 길로 초대받았음을 선포하는 행위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의 여정 안에서, 오늘 이 자리에서 예수와 함께 살고, 함께 죽음으로써 비로소 완성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늘 이 자리'는 독일의 성서학자 헤르만 군켈(Hermann Gunkel)의 표현대로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일상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말합니다. 그 "삶의 자리"에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의 선포를 우리의 선포로 살아 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 앞에 유유히 흐르는 요르단 강을 그리스도와 함께 건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 세례 축일에 우리가 받은 세례의 의미를 되새기는 이유입니다.
 

 
 
김홍락 신부 (가난한 그리스도의 종 공동체)
교부학과 전례학을 전공했고, 현재 필리핀 나보타스(Navotas)시 빈민촌에서 도시빈민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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