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의 역사의 창, 교회 3]

순교는 인간의 정리를 끊고 하느님의 가르침에 절대적으로 자신을 내맡기는 행동이다. 인간의 마음에서 가장 강인한 감정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생각 특히 어린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모성애일 터이다. 우리나라 순교자들이 끊어야 할 인간의 정리 가운데에는 바로 이러한 자식에 대한 사랑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자식생각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러기에 우리 교회사에서는 자식 때문에 배교해야 했던 어머니들이 나타나며, 자식과의 생이별을 강요당했던 어버이들, 순교로 인해 부모를 사별하게 된 자식들도 적지 않았다.

어린 자식을 노비로 남긴 어머니의 사랑

박해시대 천주학을 신앙하는 일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 하고 가정의 풍비박산까지도 각오해야 했던 중대한 결단이었다. 부모의 순교는 그 자식들에게 떠돌이 고아가 되어 평생을 고생하며 살아야 함을 뜻했다. 가정은 파괴되고 가족은 사방으로 흩어져 지내야 했다. 1801년의 박해과정에서도 신앙으로 인한 가족의 해체현상을 찾을 수 있다. 이와 같은 대표적 사례는 황사영의 가족들을 들 수 있다.

황사영(黃嗣永)이 백서 사건으로 인해 대역부도죄로 죽음을 당한 다음, 그 가족도 연좌율을 적용받아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황사영의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의 관비(官婢)가 되었고, 그의 처 정명련은 제주도의 관비로 보내졌다. 당시 지방 관아로 보내진 관비는 창녀처럼 지내야 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황사영의 두살박이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의 관노가 되었다. 만일 황경한이 그때 나이가 좀더 들었었다면, 아버지 황사영의 죄에 연좌되어 처형되어야 했었다. 그러나 그는 어린 나이 때문에 처형을 면하고 추자도의 관노로 평생을 살아가야 했다.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하여 우리 교회에서는 하나의 전설이 태동되었다. 즉, 황사영의 처와 아들은 죽음을 면하여 강진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로 유배가게 되었다 한다. 물론 황경한은 나이가 차면 제주도에서 죽을 운명이었다고 이 전설에서는 묘사되고 있다. 아들의 운명을 알고 있었던 어머니 정명련(丁命連)은 제주도로 유배를 가던 도중에 뱃사공을 매수하여 추자도에 이르러 어린 아들을 바위 위에 내려놓고 홀로 떠났다 한다. 그 아들은 착한 섬사람에게 거두어져서 살아났다고 전설에서는 말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는 차이가 나는 일이며, 황경한은 애초부터 추자도에 유배형을 받았다. 이 애절한 전설은 정명련의 마음을 읽어낸 후대의 신자들이 만든 이야기였다. 그 모자를 기억하는 후대의 사람들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벌거숭이 어린아들과 헤어지던 어머니의 아픈 마음을 이렇게 읽어내고자 했다.

1801년의 박해 과정에서 김한빈(金漢彬)도 죽음을 당했다. 원래 그는 포수였지만, 천주교에 입교한 이후 정약종의 집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 후 그는 황사영과 연계되었고 이 때문에 체포되어 순교했다. 그는 아마도 홀아비였던 듯하다. 그런데 그에게는 어린 딸 김성단(金聖丹)이 있었다. 김한빈이 죽은 후 그의 딸은 전라도 장수로 귀양갔다. 아마 김한빈은 자신이 남긴 유일한 피붙이였던 어린 딸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감옥에서도 그리고 죽음의 마당에서도 잊지 않고 통곡했을 법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가는 순교의 길을 인간이면 행해야 하는 떳떳한 도리로 여겼기에 죽음을 선택했었다. 아마 김성단은 아버지를 자랑과 슬픔으로 기억했을 법도 하다.

▲ 황사영이 백서를 쓴 한평 남짓한 토굴과 신학당.

자식을 성숙시킨 부모의 사랑

1839년 1월 16일 서울에서 남자 네 명, 여자 여섯 명이 4-5세 되는 어린이 네 명과 젖먹이 셋을 데리고 감옥에 압송되어 수감되었다. 그들의 죄목은 천주학을 한다는 것이었다. 조금 측은한 마음이 든 관원들에게도 이 죄 없이 포도청에 갇힌 어린 것들을 보기란 참으로 가슴 아픈 정경이었다. 관원들 자신도 어린 것이 딸린 어머니들까지 이렇게 체포해 온 일에 분개하였다. 그 후 여러 날이 지나서야 신문이 시작되었다. 감옥에서 시달리던 불쌍한 아기 엄마들은 신문을 당하기가 무섭게 배교하고 아이들과 곧 석방되었다. 그들은 순교의 영광 대신에 자식에 대한 사랑의 길을 택했다. 이들을 과연 배교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1839년 전라도 전주에서 있었던 일이다. 옥에 갇혀있던 5명의 신자들은 사형선고를 받았다. 정태봉(鄭太奉) 바오로는 자기의 심약함에 안심이 안 되어 그 날 아내와 아이들을 오지 못하게 하여 달라고 옥졸들에게 청하였다. 그들이 처형장소로 가는 동안 이일언(李日彦) 욥의 아이들이 울며 아버지를 따라 오니 이일언은 그들에게 기쁜 말투로 말하였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이 옥중에서 신음했는데 오늘 마침내 천국으로 떠나간다. 왜들 우느냐. 오히려 내 행운을 기뻐하라, 너희 아버지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을 기뻐하고 언제까지나 훌륭한 교우가 되어라.” 그들 5명은 장마당에 모여든 많은 군중 가운데에서 모두 참수를 당하였다. 그들 내부에는 자신의 순교가 진정으로 자식을 잘 키우는 일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듯하다. 초기교회에서 교리도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던 우리의 순교자들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며, 그들을 위로했다.

자식을 성숙시킨 부모사랑

1839년의 박해는 최경환 프란치스코를 성인으로 탄생시켰다. 그러나 최경환의 부인이며,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인 이마리아는 순교자였음에도 아직 복자품에도 오르지 못했다. 이마리아에게는 외국으로 신품공부를 떠난 큰 자제 외에도 12세 된 야고보와 9세, 7세, 5세 된 어린 자식들이 있었다. 부모들이 옥에 갇힌 후 야고보는 소년 가장이 되어 옥바라지를 하며 어린 동생들도 지켜야 했다. 이 가련한 정경이 눈에 어린 이마리아는 한 때 자식생각 때문에 배교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옥중에 있던 다른 여교우들의 권면으로 배교를 철회하고 감옥에 남았고 순교의 길을 걸었다.

이마리아는 순교를 앞두고 감옥을 찾은 야고보의 머리를 빗겨주며 이르시되, “아무쪼록 어린 동생들을 각별히 사랑으로 보호하여 친애하며 아무 곳, 아무 곳에 각각 데려다 두고 아직 어떻게든지 지나노라면, 중국 마카오에 가 있는 너의 형이 나오면 자연히 안배하리라... 아무 날은 내가 치명하는 날이라. 그날은 오지 말도록 하여라. 만일 내가 너를 보면 미진한 육정에 유감이 들까 하노니 오지 말라”고 하며 어서 가기를 재촉했다. 열두살짜리 아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놓고 마지막 길을 떠나는 어머니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야고보의 어린 가슴 무이는 듯 막히이고, 눈물은 앞을 가려 지척을 분별할 수 없더라. 시름없는 걸음으로 집에 돌아와” 전전푼푼을 구걸하여 모았다. 야고보는 옥사장이를 찾아가 모친 치명하신다는 당일에 형을 집행할 희광이가 누구인지를 알아내어 그를 찾아가 전냥을 주며 부탁했다. “모습이 이러이러한 죄수는 우리 모친이시니, 칼을 갈아 행형하되, 각별히 조심하여 주시오.” 야고보는 날이 선 칼로 어머니의 목을 단번에 쳐 주어 고통을 줄여주기를 겨우 바랄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날 그는 행여 어머니의 눈에 띌세라 먼발치에서 그 순교의 길을 쫓아갔다. 어머니가 처형되던 광경을 바라보고 돌아온 야고보에게 어린 동생들은 “어머니가 언제 나오시냐”고 물었다.

맺음말

박해는 순교자를 탄생시켜 성인의 숫자를 늘려주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을 누르고 순교의 길을 택한 장한 어버이들이 이 과정에서 생겨났다. 또한 박해는 가정을 파괴했고, 어머니를 배교자로 만들기도 했다. 박해는 어버이를 잃은 어린이들을 겉 자라게 하여 사람들을 더욱 슬프게 했다. 박해 때에 그 힘든 일을 끌어안았던 이 땅의 어머니들은 진정한 성모 마리아의 모상이었다. 자식 때문에 자신의 신앙을 접어야 했던 어머니들도 또 다른 성모요 마리아였다. 이 성모 마리아님들의 고뇌 안에서 우리 교회는 성숙되어 갔다. 이제 우리는 이 모든 어머니와 아버지들이 참되게 살았던 사랑을 따뜻한 가슴으로 맞아야 한다.

/조광 고려대학교 교수, 사학 200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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