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환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은 좋은 책을 만나는 것과 같이 다복한 일이다. 내가 교과서 바깥에서 책을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직전이었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엔 밤늦도록 도서관에 남아서 교과서를 외우고 참고서만 탐독했다. 내가 처음 읽은 교과서 아닌 책은 고등학교로 넘어가기 직전 맞이한 겨울방학 때 읽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었다. ‘알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외침처럼 나는 처음 ‘책’을 만났다. 물론 그 뒤로 읽은 두 번째 책이 <괴도 루팡>이었고, 세 번째 책이 게오르규의 <25시>였으니 그야말로 중구난방으로 책을 읽었던 셈이다.

도서관 자리잡기 경쟁에서 빠져나오려고, 내가 고등학교에서 선택한 서클은 ‘도서부’였다. 그저 공부 때문에 선택한 도서관 서고 출입으로 나는 내 생애에서 가장 많은 책을 고등학교 3년 동안 짧은 시간 안에 읽어치웠다. 그중 유토피아를 꿈꾸는 <태양의 나라>가 인상적이었다. 수도사였던 캄파넬리가 쓴 책으로 그리스도교 교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유토피아를 그린 책이다. 이 때문에 캄파넬리는 교황청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고 읽은 기억이 난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은 도서부 담당교사였던 선생님이 추천해 주신 책이었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였다. 전교조 시절도 아닌 1980년대 초였는데, 국토지리 과목을 가르치던 선생님이 당시 판금서적이던 이 책들을 왜 학생들에게 소개했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동네에서 꽤 크다는 서점을 세 차례 이상 찾아가 조른 덕분에 얻은 책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였다. 본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였던 이 책은 무교회주의를 창시한 우찌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아 우리 조선인의 시각에서 성경을 다시 읽고, 그 성경의 관점에서 조선역사를 다시 읽은 책이다. 민중신학에 영향을 주었던 이 책을 나도 귀하게 여기고 새겨 읽었다.

대학에 들어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선배들이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물었을 때, 함석헌과 유치환을 예로 든 것이 실마리가 되어 학생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으니, 공공연한 장소에서 하는 말은 가려서 해야 할 모양이다. 스승이 책을 인도하고, 책이 삶을 인도한 셈이다. 학생시절 내 인생의 최고의 책을 꼽으라면 당연히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이다. 그 당시 나는 ‘예언자’의 신원에 열광했던 듯싶다. 그 선택은 젊은 시절 충분히 의미있는 갈증이었다.

이제 새해를 맞으면서 쉰 한 살이 된다. 흰 머리카락이 눈에 띄게 늘었고, 때로 몸이 지치고, 시선이 허공을 좇는다. 어쩌면 내가 처음 읽은 책 <데미안>에서처럼 또다시 새로운 세계를 갈망하는 나이가 된 게 아닌가 의심한다. 예전과 바탕에서 다르지 않지만, 초점이 약간 달라진 세계.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이 쓴 <어둠 속에 갇힌 불꽃>에 말하듯이, 비극과 슬픔의 현실을 번갯불처럼 파헤쳤던 코츠커뿐 아니라, 이제는 어두운 시간을 빛나게 했던 따뜻한 성정을 지닌 바알 셈을 만나러 가고 싶다.

문득 고등학교 시절 내 일기에 곱게 옮겨적었던 유치환 시인의 ‘선한 나무’가 떠오른다. 선한 나무를 쉽게 발견할 수 없는 세월에 스스로 선한 나무가 되어 보려 했던 시인의 마음에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해마다 나이는 늘어가는데, '선한 나무'가 되기에 턱없이 부족한 내 모습에 황망한 눈초리를 보낸다. 내게 말을 건네 왔던 소중한 책들처럼, 나 역시 한 권의 책이 되어 후배들에게 선물이 되고 싶은 욕심 한 번 새해에 가져본다.     

내 언제고 지나치는 길가에 한 그루 남아 선 노송(老松)있어 바람 있음을 조금도 깨달을 수 없는 날씨에도 아무렇게나 뻗어 높이 치어든 그 검은 가지는 추추히 탄식하듯 울고 있어, 내 항상 그 아래 한 때를 머물러 아득히 생각을 그 소리 따라 천애(天涯)에 노닐기를 즐겨하였거니, 하룻날 다시 와서 그 나무 이미 무참히도 베어 넘겨졌음을 보았나니,

진실로 현실은 이 한 그루 나무 그늘을 길가에 세워 바람에 울리느니보다 빠개어 육신이 더움을 취함에 미치지 못하겠거늘, 내 애석하여 그가 섰던 자리에 서서 팔을 높이 허공(虛空)에 올려 보았으나, 그러나 어찌 나의 손바닥에 그 유현(幽玄)한 솔바람소리 생길 리 있으랴.

그러나 나의 머리 위, 저 묘막(渺漠)한 천공(天空)에 시방도 오고 가는 신운(神韻)이 없음이 아닐지니, 오직 그를 증거할 선(善)한 나무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로다.(유치환, 선한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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