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3일 주님 세례 축일 : 루가 3, 15-16, 21-22; 이사 42, 1-4.6-7.

예수님은 일찍이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요한이 행하던 회개의 세례 운동에 예수님이 가담하셨던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 신앙공동체들은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받은 사실이 복음 선포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요한의 제자들도 그의 뒤를 이어 세례운동을 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들은 세례를 준 요한이 예수님보다 더 큰 인물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받은 사실을 숨기지 않고 보도하면서, 사람들의 시선이 세례를 준 요한에게 가지 않고, 세례를 받은 예수님에게 가도록 장치를 하였습니다. 그 장치의 하나가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요한의 고백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준다는 말은 성령이 불혀 모양으로 제자들에게 내려왔다고 말하는 사도행전의 성령강림 장면을 상기시킵니다. 루가복음서와 사도행전은 같은 저자가 집필하였습니다.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는 고백은 예수님에 비하면, 요한은 종도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세례 사실은 알리되 요한은 예수님의 출현을 예고한 인물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기도하고 계실 때,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태로 그분 위에 내리셨다.’고 말합니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내려오시는 것은 예수님 안에 하느님이 새로운 창조를 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새롭게 창조된 인간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다고 말합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 말씀은 시편(2,7)의 메시아에 대한 말과 이사야서(42,1)의 “하느님 마음에 드는 종”이라는 말을 합성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인데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은 하느님의 종이라는 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반영된 말입니다.

신약성서는 그리스도인이 받는 세례를 죽음과 관련짓습니다. 마르코복음서는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오실 때, 그분의 오른 편과 왼편에 앉게 해달라는 제자들에게 “당신들은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까?”(10,38)라고 예수님이 반문하셨다고 합니다. 여기 “내가 받는 세례”는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바울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는 누구나 다 그분의 죽음과 하나가 되는 세례를 받았다.”(6,3)고 해설합니다. 초기 신앙공동체가 세례를 죽음과 관련지어 생각한 것은 세례로써 시작된 예수님의 활동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났기 때문입니다. 그 죽음은 예수님이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으신 결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말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대하듯이, 이스라엘의 국권을 회복하고, 현세적 번영을 주는 인물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보여준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의 모습은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이고,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하는 일입니다. 세례는 내어주고 쏟는 그 삶을 시작하는 성사입니다.

세례로써 하느님의 자녀 되는 사람은 새로운 삶을 삽니다.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배워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재물은 이 세상에서 나의 삶을 편하게 해줍니다. 권력은 나를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게 해줍니다. 나 한 사람 편하고, 나 한 사람 행세하며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입니다. 재물과 권력은 나를 중심으로 한 세상에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나 한 사람의 안일(安逸)과 출세(出世)를 보장하기 위해 사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하느님이 아닙니다. 성전은 우리의 뜻을 이루어 주는 민원실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녀 된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삽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마태 6,24). 하느님과 현세적 부귀영화를 동시에 얻으려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현세적인 것을 잃는 것이 죽음입니다. 잃고 또 잃으면, 자기 목숨마저 잃습니다. 사실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스스로를 잃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자녀를 낳고 키우는 부모는 부모로 살기 위해 많은 것을 잃습니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재물과 지위와 권력을 자기 인생의 최대 보람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비는 사람은 이웃을 형제자매로 생각합니다. 재물만을 좇는 사람은 자기의 자유가 재물만을 위한 것이라 착각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이 그 자유의 목적입니다. 이웃을 불쌍히 여기며 아끼고 보살피면,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우리 자유 본연의 뜻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 신앙으로 입문하는 성사입니다. 우리의 삶을 바꾸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며 사는 자유를 누리겠다고 약속하는 성사입니다. 우리 자신을 위한 허례허식(虛禮虛飾)을 끊어버리고, 하느님의 자유를 좇아 살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이 세상의 물질과 부귀영화를 자기 삶의 유일한 보람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례는 그런 것을 인생 최대의 보람으로 생각하였던 자기의 과거에 죽는 성사입니다. 자비롭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실천하며 살기 위해 새롭게 살겠다는 성사입니다.

우리는 총선과 대선을 얼마 전에 치렀습니다. 각 후보들이 유권자의 표를 얻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들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나 한 사람 뽑아달라고 남을 비방하고 흑색선전을 하는 모습들도 우리는 많이 보았습니다. 입으로는 백성을 섬기겠다고 말하면서 자기가 표를 많이 얻고, 자기 한 사람이 잘되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사는 인간이 당연히 하는 경쟁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그런 출마를 하지말자는 말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누구나 사람이면 그를 소중히 생각하고, 그의 말에 귀기울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가 세례를 받고 물에서 나오자,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고 말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우리가 받은 세례도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또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가 되도록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1964년 파리에서 서품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