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의 역사의 창, 교회 2]

우리나라 박해시대의 기록에 보면 몇 쌍의 동정부부를 확인하게 된다. 동정부부는 결혼한 후에도 상호 성적 관계를 가지지 않고 동정성을 지키며 살아가던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일반 상식과는 매우 다른 삶을 살고 있었지만, 박해시대 교회에서는 이러한 삶의 형태를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원래 결혼은 신체적 순결을 전제로 하는 동정생활과 차원이 다르다. 결혼한 부부는 동정생활이 아니라 상호간의 신의를 지킴으로써 신체적 순결을 유지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 동정부부의 존재는 19세기 당시의 독특한 영성과 수도원이 존재하지 않았던 박해시대의 상황이 낳은 독특한 삶의 양식이었다.

동정부부가 출현하게 된 배경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치는 신자들의 삶에는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일반 평신도의 삶이 있다. 성직자는 순결을 서원하고 하느님의 백성에 대한 봉사의 길을 걷고 있다. 수도자들은 순종과 청빈 그리고 순결의 복음 삼덕을 서원하고 하느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신도들은 결혼생활을 하며 세속 안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해 간다.

박해시대 우리나라에서는 그리스도교적 삶의 양식 가운데 독신의 금욕생활을 특히 중시하고 있었다. 이 점은 당시 신자들에게 널리 읽히고 있었던 한글 천주교서 등을 통해서 확인된다. 예를 들면 <성경직해광익>에 나오는 삼왕래조후 제2주일 복음묵상에서는 교회의 회중들을 세 가지 품격으로 나누어 평가하고 있었다.

즉, 상품으로는 동정을 지키는 사람들을 들었고, 중품으로는 과부나 홀아비가 된 이후 다시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했다. 그리고 하품으로는 지아비와 지어미가 함께 사는 생활을 들었다. 그리고 상품은 금이요, 중품은 은이며, 하품은 구리라고 비유하여 말했다. 이처럼 신자들은 그 삶의 방식에 따라 분명한 서열로 구별되어 있었다. 이러한 등급이 정해진 까닭은 가족문제에 마음을 쓰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일에만 투신할 수 있는 삶을 동신(童身) 내지는 독신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세계교회사의 전통을 보면 금욕생활을 높게 평가하는 관행이 존속해 오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이단사상에서는 결혼제도 자체를 거부하거나 결혼의 가치를 낮추 평가했다. 예컨대, 서기 2세기 경 타티아누스(Tatianus) 일파는 금욕주의를 주장하며 결혼의 부당성을 주장한 바 있었다. 또 서양의 중세인 13세기 전후 알비(Albi)파 이단에서도 결혼의 금지를 그리스도교적 금욕의 이상형으로 내세우다가 단죄되었다.

한편, 17세기 중엽부터 18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유럽 교회에서는 얀세니즘이 강하게 일어났다. 이들은 성속과 영육 등 이원론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엄격한 신앙의 실천을 위한 금욕생활을 강조했다. 그리고 17세기 후반기 유럽서는 정적주의가 성행하고 있었다. 정적주의자들은 모든 세속 일을 피하고 결혼과 결혼행위를 경멸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유럽교회의 영성적 병통이 박해시대 한문교리서를 통해서 우리나라 교회에 부분적으로 전래된 바 있었다. 여기에서 박해시대 교회에서는 금욕생활을 완덕에 이르는 주요한 통로로 인식하고 동정의 가치를 강조했다. 이와 같은 영성적 분위기에서 동정부부가 탄생되고 있었다.

한편, 교회적 삶의 주요형태로는 수도자의 삶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박해시대 우리나라에서는 공식적인 수도생활의 실천이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수도생활을 지망하던 일부 신자들은 일종의 '위장결혼'을 통해 동정부부로 지내며 수도자의 삶을 살려는 비상대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이처럼 동정부부는 19세기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던 교회사적 특성에 따라 출현한 삶의 형태이기도 했다.

동정부부들의 생활

우리 교회사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동정부부는 유중철(柳重哲, 요한)과 이순이(李順伊, 루트가르다)의 사례를 들 수 있다. 유중철은 유항검의 맏아들이었다. 유항검은 호남지방의 사도로 불리운 인물이었고, 이순이는 서울 명문가의 규수였다. 이들은 동정의 삶을 살고자 했고 이를 전해들은 주문모 신부는 결혼이라는 외관 속에 이 두 마음을 결합시켜 그들 서로의 뜻대로 남매처럼 살도록 주선했다. 이순이가 남긴 한글 편지를 보면 이 기간 동안 10여 차례 동정의 생활을 파기하려는 ‘유혹’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혼 후 4년 동안 부부가 아닌 남매처럼 지내다가 1801년의 박해 때에 순교했다.

동정부부에 관한 또 다른 사례는 여항덕(呂恒德, 즉 劉方濟) 신부의 편지에서 발견된다. 즉, 여항덕 신부는 1834년에 입국한 이후 ‘글라라’라는 신자를 만났다. 글라라는 결혼할 때부터 남편과 함께 평생 동정을 지키기로 약조하고 이를 실천해 오다가, 그의 ‘남편’은 1801년의 박해 때에 주문모 신부와 함께 순교했다. 이 사례에서 교회창설 초기부터 동정부부들에 관한 사례가 여럿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숙(趙淑, 베드로)와 권데레사도 동정부부였다. 권대레사는 우리나라 교회의 창설자 가운데 하나인 권일신(權日身)의 딸이었다. 권데레사는 1801년의 박해 때에 18세의 처녀였다. 이 박해의 과정에서 그의 가정은 풍비박산이 되었고, 그의 친척들도 다수가 순교했다. 그는 1804년 친척들의 권유로 조숙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결혼 첫날밤 권데레사는 조숙에게 동정을 지키고자 하는 자신의 의사를 알렸고, 원래 신자였던 조숙도 이에 동의했다. 그들은 동정부부로 15년 간을 함께 지냈고 권데레사는 1819년 5월 21일 서울에서 참수치명했다.

한편, 박해시대 교회사에서는 결혼생활을 하던 신자들이 금욕생활로 전환했던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여항덕 신부는 민(閔)가라는 사람이 노년에 아내와 함께 천주님을 알아 정덕을 지키기로 결심하여 고신 극기를 실천했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1866년의 박해 때에 순교한 황석두도 그의 아내와 별거하면서 절제생활을 하기로 동의했던 사람이었다. 이들 이외에 홀아비나 과부가 다시 결혼을 아니하고 금욕생활을 실천하는 사례들도 나타나고 있다.

남은말

우리 교회사에 등장하는 동정부부들은 선교사의 격려를 받으며 자신들이 정한 방법에 따라 동정부부의 길을 걸었다. 그들은 극도의 금욕생활을 통해 금과 같은 상품(上品)의 신자생활을 살고자 했다. 그러나 동정부부의 관행은 당시 조선 사회에서 결코 이해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또한 이는 서유럽의 교회 안에서도 존재할 수 없었던 특이한 삶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를 실천했던 신자들은 자신들이 새롭게 터득한 이념적 공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실험하면서 그리스도교적 완덕을 지향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실험은 주문모 신부가 선교하던 18세기 90년대의 후반기에 집중적으로 전개되었다. 동정부부의 생활은 당시 교회에서 높게 평가되기도 했다. 베르뇌〔張敬一〕주교는 1857년 신자들에게 사목서한에서 수정(守貞)을 하고자 하는 부부도 사제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명기한 바 있다. 그러나 그들의 시대에는 동정부부의 사례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로 미루어 보면, 동정부부의 풍조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한 이후 점차 소멸되어 간 듯하다. 이는 주문모 신부와 프랑스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던 신학적 인식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현상일 수도 있었다.

박해시대 신자들의 동정부부 생활은 수도자의 영성에 대한 모방일 수 있었다. 당시는 신자들의 영성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고, 일반 신자들은 일등이나 이등의 신분이 아닌 삼등급의 신분으로 평가받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모방이 긍정적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신학에서는 사회 안에 살면서 누룩처럼 사회를 복음화시켜 나가야 하는 평신도들만의 고유한 영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제 수도생활을 지원하는 사람들은 수도회에 입회하여 자신의 원의를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해시대 동정부부의 ‘비정상적’ 삶은 역사의 한 장면으로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유교적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교의 완덕을 수행하려 했던 그들의 과감한 결의만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깨우침을 재촉하는 죽비가 되어 오늘의 우리 마음을 울리고 있다.

/조광 고려대학교 교수, 사학 2008-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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