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의 영성과 가톨릭일꾼운동의 한국적 적용-5]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 시대에 돌입하면서 미국에서는 노동조합과 사회정의를 부르짖는 사람을 무조건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이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 속에서, 1949년 뉴욕대교구의 임금동결에 반대하여 무덤 파는 인부들이 파업을 하자 스펠만 추기경은 인부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을 받았다고 언론에 발표했다. 추기경은 인부들과 만나는 것을 거부하고 신학생들을 시켜 파업이 사그라질 때까지 무덤을 파게 했다. 도로시 데이는 항상 주교들에 대한 존경을 강조했으나, 추기경이 파업을 무산시키려고 시도하자 유감을 표명했다.

 
도로시는 메디슨가의 세인트 패트릭 성당 뒤에 있는 추기경의 호화로운 사무실 앞에서 몇 명 안 되는 인부들의 시위대에 참가했으며, ‘성직자와 평신도간의 전쟁이라는 끔찍한 전쟁의 희생자들’이라는 칼럼을 <가톨릭일꾼> 신문에 게재하였다. 결국 파업은 한 달 만에 실패하고, 도로시는 1951년 추기경의 호출을 받았다. 도로시가 공공연히 추기경을 비난하고, 역사상 처음으로 가톨릭 평신도들이 주교관 앞에서 벌인 시위에 참여하고, 또 공산주의자들을 비난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추기경은 도로시에게 <가톨릭일꾼> 신문의 발간을 중지하든지 제호를 바꾸라고 명령했다.

도로시 데이는 가톨릭일꾼운동은 ‘가톨릭’이라는 이름이 가져다주는 공식적인 보호에 의존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순명 차원에서 폐간 대신에 이름을 바꾸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문의 다른 편집인들은 한사코 이를 거부했다. 이 때문에 도로시는 독립적인 평신도 단체인 ‘가톨릭참전용사’라는 단체가 이름을 바꾸라는 압력을 받은 적이 없음을 상기시키면서, <가톨릭일꾼> 역시 교구의 공식적 견해가 아닌 의견을 자유롭게 밝힐 수 있는 게 아니냐고 추기경에게 반문하는 편지를 보냈다.

한편 공산주의자로 몰린 로젠버그 부부의 처형을 반대해 달라고 추기경에게 청원했던 도로시는, 결국 이들이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고위 성직자들은 인간을 말살하는 폭탄을 만드는데 사용될 쇳조각에 성수를 뿌리고, 폭격기에 ‘죄 없는 성인’이나 ‘자비의 성모’ 등으로 이름을 붙이고, 1만 5천 명을 죽이는 단추를 누르는 사람을 축복한다.”

도로시는 환대의 집을 통해 자선을 베풀 뿐 아니라, 가난과 전쟁을 불러오는 제도 권력에 도전하고 저항하는 신앙의 의무 역시 수행했다.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든 감옥에 가든 도로시는 매일 미사와 로사리오 기도, 최소한 하루 2시간의 성서 묵상을 거르지 않았다. 한번은 이런 글을 썼다. “우리가 충분히 사랑한다면 끈질기게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묵주신공에서 성모송을 되풀이 할 때마다 사랑을 되풀이 하게 된다.” 그는 기도해야 할 사람들의 목록을 적어두고 매일 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했다.

그는 자신을 ‘충성스럽고 순종적인 교회의 딸’이라고 부르며, 지금이라도 추기경이 활동금지 명령을 내리면 즉시 따르겠노라고 했다. 기본적으로 도로시 데이는 가톨릭 교리와 교회구조를 성심껏 받아들였다. 그는 가톨릭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비판하지 않았고, 다만 그 가르침을 교회가 살지 못한 것에 대해 질책했다. 그는 자주 ‘순명’을 강조했는데, 만일 추기경이 평화주의를 포기하라고 명령하면 도로시는 이렇게 말하며 순명했다.
 
“아니요, 평화주의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추기경이 포기하라고 명령한다면, 우리는 우리 말은 빼고 평화에 대한 성서의 말씀, 성인들의 말씀, 교황회칙에 나온 말들만 인용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도로시는 누구도 교회의 권위를 경멸하지 않기를 바랐다. 많은 이들이 도로시가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이 신비라고 여겼다. 확실히 도로시 데이는 더 작은 교회 안에서만 편안했다. 도로시는 가난과 전쟁에 대한 교회의 태도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자서전 <긴 외로움>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이신 교회를 사랑합니다. 교회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나 자주 교회는 나에게 스캔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십자가이기 때문에, 그 위에서 그리스도가 못 박혔던 십자가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떼어놓아서는 안 됩니다.”

도로시 데이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뜻대로 행하라”는 말을 자신의 표어로 삼았다.“이 말씀에는 자유가 숨 쉬고 있었고, 이 자유는 세속적 불의의 와중에서도 변함없이 추구한 인류의 이상이었다. 성서와 성인들의 작품을 탐구하면서부터 나는 더 이상 다른 위대한 지성들의 뒷받침을 받을 필요가 없음을 느꼈다”고 전한 도로시 데이는 이어 “신앙이란 우리가 순종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입방아를 찧고 있을 그때에 요구되는 것이다. 곧 우리를 창조하신 한분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한 분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말한다. 우리가 순종의 자유와 불순종의 자유를 부여받았다면 우리가 순종을 드려야 할 대상은 오로지 한분 하느님뿐이라는 바로 그 신앙이다.”.(<오늘, 유성처럼 살아도>, 255-256쪽)라고 말했다.

도로시 데이는 교회 안에서도 ‘반대 받는 표적’이 되었으나 가능하다면 교도권과 일치해 자신들의 일을 계속해 가려고 노력했다. 또한 자신을 반대하는 이들과도 공동선 안에서 일치하려고 애썼다. 당시 도로시 데이와 가톨릭일꾼운동은 오해를 무릅쓰고 사제와 고위 성직자들이 할 수 없었던, 또 하지도 않으려 했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분야에 과감히 뛰어들었다. 이 모든 노력은 낡은 옛 껍질 속에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참고

<오늘, 유성처럼 살아도>, 도로시 데이, 바오로 딸, 1995
<잣대는 사랑>, 짐 포리스트, 분도출판사, 1991
<도로시 데이와 함께 하는 기도>, 제임스 알레어, 로즈메리 브로턴, 성바오로 1998.
<하느님, 나, 우리, 그리고 가난>, 참사람되어, 2000. 8
<야곱, 상처를 대면하다- 불안한 시대에 하느님을 찾아서>, 케리 월터스, 참사람되어, 2003
<세상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참사람되어, 2004. 2.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 로버트 엘스버그, 참사람되어, 2005
<진정으로 평화를 원한다면>, 참사람되어 200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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