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사목일기]

12월 19일, 저녁 6시, 프놈뻰의 한 한국 식당.

두 달 만에 시골에서 사목하는 친구 신부가 프놈뻰에 올라왔기에 선배 신부와 함께 시내의 한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오랜만에 만나 사는 이야기도 듣고 싶었지만, 내심 선거 결과를 함께 보고, 함께 기뻐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있었다. 밥이 나왔을 때는 이미 개표가 시작된 지 두어 시간 지났고 나는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른 채 스마트 폰으로 개표 상황을 연신 확인했다. 다른 두 신부도 서로 이야기하다 가끔 개표 상황을 내게 물었다. 개표는 계속 되건만 표차는 줄지 않았다. 손에 땀이 나도록 초조했지만 그래도 서울 개표가 아직 남았기에 뒤집힐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트위터를 들여다보았다.

술이 한두 잔 돌자, 친구 신부는 개표에는 이미 초연한 듯 지난 두어 달 사목을 하면서 성찰한 바를 천천히 토해 놓는다. 친구 신부는 얼마 전 본당 신자들과 본당에 딸린 논에서 벼 베기를 했단다. 오전 한나절 벼를 베다가 그 따가운 햇살 밑에서 도저히 더는 버틸 수가 없어, 태양이 머리꼭지 위에서 이글거릴 무렵 염치불구하고 슬그머니 밥 나르는 일로 옮겨갔다. 그리고 저녁에 사제관에 돌아와서는 뻗어버렸다. 부끄러웠단다. 세상물정 모르는 외국 신부가 책에서 읽거나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이야기로, 구원이 어떠니 하늘나라가 어떠니 떠들었을 때, 미사 끝나고 다시 땡볕으로, 아무리 일해도 나아지지 않는 삶 속으로 다시 나가 일해야 하는 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생각하니 낯을 들 수가 없었다.

▲ 목수집 아기, 2010년 캄보디아 꼼뽕츠낭 ⓒ 김태진

추수가 다 끝나고 성당 마당에 나락 열 가마니를 쌓아 놓았다. 정부 수매가 없으니 쌀농사 지은 사람이 알아서 팔아야 하기에 군 단위 도정업자를 불러 팔려고 했다. 11톤 트럭을 몰고 온 도정업자는 가마니 여기저기를 쑤셔보더니 죽정이가 너무 많다고 그나마 실한 두어 가마니만 가져갔다. 나락 1킬로에 830리엘, 우리 돈으로 200원. 그런 나락을 수확하기 위해 몇 달을 뙤약볕 밑에서, 발은 진창에 박고, 허리를 숙이고, 눈으로 흘러드는 쓰린 땀을 훔칠 새도 없이 벼를 키웠던 이들. 풀 죽은 마을 사람들을 보면서 화가 치밀었고, 또 불쌍하고 미안했단다. 나는 이야기를 들으며 스마트 폰에 처박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농민들의 허기. 이글거리기만 하는 태양. 내가 채 다 마시지도 않고 버렸던 생수 한 병 값도 안 되는 헐 한 나락. 그들에게 하늘나라는 무엇일까? 서품받기 위해 했던 철학, 신학으로 머릿 속에 든 검정물, 컴퓨터 자판만 두드려 은어 배때기처럼 허연 손가락, 크마애 말 속의 숨길 수 없는 한국어 억양, 가끔 잘난 척 섞어 쓰는 영어. 그것들을 통해 내가 생각하고, 쓰고, 말했던 하늘나라는 이 사람들에게 이발소 그림 속의 풍경 같았을 게다. 나는 그 사람들이 어찌 사는지 무지했고, 무관심했다.

찌개 냄비가 바닥을 보이고, 선거 결과가 거의 확실해졌을 때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을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개표 결과 때문일까? 친구 신부의 솔직한 나눔 때문일까? 쌍용 노동자들의 죽음, 용산 참사, 강정 해군기지, 4대 강, 민간 사찰, 방송 장악, 인터넷 여론의 조작이 눈앞을 지나갔다. 어떻게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도덕 말살로 국민을 피폐하게 만들었던 정권, 그리고 이전의 독재정권에 면죄부를 주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분통이 터졌다. 가만히 내가 내뱉는 거친 말을 듣고 있던 선배 신부가 한마디 했다.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뽑았고 좋으나 싫으나 그들도 국민이고 이제 한국은 그들과 함께 해야 한다고. 이게 무슨 염장 지르는 소린가 싶어 되받아 치려다, 아차 싶었다. 그래 우린 너무 서로를 몰랐고 무관심했다.

여기 캄보디아나 거기 한국이나. 끼리끼리 만나 비슷한 생각들을 서로에게 재확인하면서, 다들 나처럼 생각하고 나처럼 세상을 보고 나처럼 투표하고 그래서 내가 바라는 세상이 올 거라 기대했다. 아니 저쪽 사람들을 바보 천치로 무시했거나 심지어 적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선거는 함께 희망을 나누고 힘을 모아 변화를 시작하는 계기라기보다는 지고이기는 대결이었다. 선거는 서로를 저 쪽으로 밀쳐놓았던 우리의 치부를 까발렸다. 내 꿈이 이루어지는 세상이 아니라 우리의 꿈이 이루어지는 세상이 되려면, 밀쳐놓았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그들이 도대체 무슨 경험을 했기에, 무엇을 무서워했기에, 어떤 세상을 바랬기에 그런 선택을 했는지. 우리는 서로에게 무지했고, 무관심했다.

12월 22일, 토요일 3시, 성요셉성당 판공성사

판공성사가 한 시간쯤 지났을 때 스무 살 남짓 보이는 갸름하고 하얀 얼굴의 베트남 청년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알아듣지 못하는 베트남 말고 뭐라 중얼중얼 몇 마디 죄를 고백하고는 도망치듯 가려기에 그 청년에게 크마애 말로 부탁을 했다. 조금이라도 크마애 말을 할 줄 알면 떠듬떠듬도 좋으니 크마애로 고백할 수 있느냐고. 어떤 일로 힘들어하고, 죄책감을 갖는지 함께 느끼고, 아파하고, 기도하고 싶다고.

그 청년은 내 크마애를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이곤 강한 베트남 억양이 섞인 크마애로 이야기를 했다. 크마애들을 미워한 게 죄란다. 캄보디아에 호적이 없으니 주민증이 없어 또래 크마애 청년들처럼 프놈뻰 주변에 그 즐비한 공장들은 물론, 어디고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크마애들이 미웠단다. 그래도 먹고 살아야겠기에 낮에는 공사판에서 막노동 하고, 또 한편 손수레를 몰고 다니며 길거리에 버려진 빈 음료수병, 플라스틱 생수병을 주워 팔아 산단다. 그것도 크마애들의 텃세와 욕지거리가 심해 크마애를 피해 한밤중에 다녀야 하기에 크마애들이 미웠단다. 돈이 없어 결혼식은 엄두도 못 내고 마을의 베트남 출신 아가씨와 살림을 차려 애를 낳아 키웠고 아이 호적을 만들어주려고 했단다.

캄보디아 정부에서 베트남계 사람들에게는 150달러나 하는 호적 등록비를 요구한다. 아이가 학교에 영영 못 다니게 될까 걱정이 커지는 만큼 크마애들이 미웠단다. 크마애 사회는 이 베트남계 청년, 청년의 아내, 그들이 낳은 아기도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머릿수를 셀 필요가 없는 곳으로 밀쳐놓았다. 우리는 이들에 대해 무지했고 무관심했다. 우리끼리만 우리의 하늘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저 멀리서 이 땅위의 우리 사는 모습을 내려다보셨을 때 얼마나 우스웠을까. 아니 가슴 아파 하셨을 게다. 너와 나를 가르고, 서로를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으니... 하늘나라와는 먼 쪽으로만 치달으니. 오죽했으면 성자께서 갓난 아기로 세상에 오려고 작정하셨을까.

12월 25일, 성탄절 오후 6시반 안롱긍안 미사.

매달 미사를 가는 프놈뻰 북서부 외곽의 안롱긍안(거위 못) 공소는 사실 안롱긍안 마을 안에 있지 않고 마을 서쪽 경계를 흐르는 개천가, 베트남계 사람들 집이 줄지어 있는 곳에 있다. 크마애들의 반베트남 감정과 텃세로 이 베트남계 신자들은 마을 바깥, 누구의 땅도 아닌 강턱을 따라 길게 자리 잡은 탓이다. 캄보디아 현대사며, 안롱긍안 마을이 생겨난 이야기는 여기서 다 할 수 없다. 사제 수는 모자라고, 공동체 수는 많아 우선순위에서 밀린 안롱긍안 공동체는 24일 성탄 자정 미사를 25일 저녁에 봉헌했다. 하루 늦게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면 어떤가. 사실 예수가 이 땅에 태어난 때는 기원 1년 전후도 아니고 12월 25일도 아닌 것을. 성탄이 언제였느냐보다는 성탄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미사 후에 아이들이 성탄 축하 재롱잔치를 했다. 아이들이 성탄 노래 몇 곡을 불렸고, 옷을 갈아입고 크마애 전통춤을 추었다. 다른 한 무리의 어린아이들이 목에 노란 손수건을 감고 노래와 율동을 하러 무대로 나가자 싼타옷을 차려입은 한 남자아이가 따라나갔다. 옷을 자랑하고 싶었는지, 그 흥겨움에 끼고 싶었는지 함께 섞여 무대 앞줄에 섰다. 생전 눈도 오지 않고, 아직도 한낮에는 30도가 넘는 이 더위에 빨간 털옷에 모자까지 쓴 그 아이가 낯설어 보였다. 아이들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하자 곧 스피커에서 앵앵거리며 음악이 나왔다.

아이들이 한목소리로 엄마 아빠가 나를 사랑하고 나도 엄마 아빠를 사랑한다는 내용의 노래 부르고 손발을 맞추어 율동을 하는데 이 싼타 복장의 아이는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다른 아이들처럼 미리 연습하지 않았나 보다. 얼마 안되 공소회장 할머니 손에 끌려 나간다. 서양에서 수입된 껍데기로서의 성탄 문화만으로는 참된 성탄의 기쁨을 함께 할 수 없다. 무엇을 원하는지 서로 알고, 목소리를 맞추고, 손발을 맞추는 연습을 하며 시간을 보낼 때 서로에 대해 알게 되고,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흥겨움을 만끽할 수 있다. 베트남, 크마애 아이들이 섞여, 한마음으로 율동을 하며 노래 부르는 모습에서 나는 성탄의 의미를 알아들었다.

성자께서 왜 이 땅에, 그것도 말똥, 소똥 사이 여물통 속에 약하디약한 아기로 태어나셨을까. 보고 듣고 그 안에 계셨기에 누구보다 잘 아시는 하늘나라를, 서로 갈라져 싸우는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서다. 막 태어난 아기들, 아직 어린아이들을 바라볼 때 신비롭고 행복해지는 이유는, 이 천사들이 하늘나라에서 땅에 내려온지 얼마 안되 아직 하늘나라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 각자도 저 위에 있다가 아기로 이 땅에 태어났다. 문자 그대로 강생이다. 예수의 강생이 그렇듯이, 우리도 태어나기 전까지 살았던 그 행복한 하늘나라를 지금 여기에 실현하기 위해서. 패를 가르지 않고, 서로 이해하고 손발을 맞추며 함께. 진정한 강생의 신비는 일 년에 하루가 아니고,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하는 매 선택의 순간마다 일어난다. 우리의 강생은 매 순간 하늘나라를 바라며 하는 투표이다.

 

   김태진 신부 (예수회, 캄보디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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