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파노라마-5]

샤를르 보들레르가 그의 시 ‘교감(交感)’에서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폐허의 크눔 신전 위로 작열하며 무너져 내리는 저녁노을은, 놀라운 속도의 순발력과 흡입력으로 ‘무한으로 향한 정신과 감각의 환희’를 노래하고 있었다.

며칠 동안 엘레판티네 섬의 누비아 마을에 여장을 풀고, 폐허가 되어버린 고대의 신전과 강변을 따라서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섬과 섬 사이를 속속들이 누비고 다녔다. 그러는 동안, 고대 이집트인들이 나일강 삼각주 지대의 하(下)이집트와 구분하여, 카이로 남방에서 수단에 이르는 상(上)이집트라고 불렀던 지역을 대표하는 국경도시 아스완에 사는 소수민족 누비아인들의 삶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정서를 흠뻑 맛볼 수 있었다.

카이로에서 약 950km 떨어진 나일 강 상류 제1급류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아스완은, 예로부터 실크로드 카라반(Caravan, 隊商)들의 숙박지로, 남부 누비아, 수단, 에티오피아의 상업과 교통의 중심지를 이루던 도시이다. 고대 이집트어로 아스완은 스웨네트(Swenet)라고 불렸는데, 스웨네트는 교역(交易)과 시장(市場)을 의미한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그들이 ‘천상의 강’이라고 부르는 나일 강의 수원(水源)이, 바로 이 아스완의 엘레판티네 섬에 있는 한 동굴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바로 이 동굴 속에 살고 있는 나일 강의 신 하피(Hapy)가 홍수와 범람을 주관하고 있다고 믿었다. 

▲ 폐허의 신전에서 절창(絶唱)을 토해내는 고대의 석조 파편들.ⓒ 수해

종일토록 고대인들이 다산(多産)과 풍요(豊饒)를 기원했던 폐허의 크눔 신전 유적지를 이리저리 배회하며 늪처럼 깊은 심연의 오솔길을 걸어가고 있는 나에게, 놀라운 볼거리를 보여주겠다고 유혹하면서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어느 아랍인이 있었다. 입고 있는 복장으로 미루어 짐작해보았을 때, 틀림없이 현재 휴관 중인 아스완 박물관의 경비원이었다.

한동안, 바람을 가르며 초록빛 강물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흰 돛단배와, 하늘 높이 치솟은 이슬람 모스크에서 무시로 울려 퍼지는 아잔소리와, 콥트교회의 첨탑에서 울려 퍼지는 맑은 구리종 소리와, 누비안 마을 곳곳마다 서 있는 타원형 오지 물 항아리에서 한 방울, 한 방울씩 숨죽이며 흘러내리는 열대의 증류수와, 질화로 가에 빙글게 둘러앉아 한가로이 물담배를 피우며 담소를 나누는 누비안 노인들의 성자(聖者)와 같은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노라니, 차츰차츰 고질적인 몸살 기운이 도져 오르고 있었다.

무언가 가슴 속에서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 미처 내면에서 발효되지 않고 급격히 소용돌이쳐대는 시어(詩語)들의 범람 때문에, 고질적인 감성의 몸살이 시작되는 이런 시즌에 돌입하게 되면, 나는 마치 신탁(神託)을 기다리는 고대의 샤먼처럼 치명적으로 엄숙해져 버린다. 그리고 이때가 되면, 그 어떤 대상과도 단 한마디의 대화도 나눌 수 없다. 아니, 대화 자체가 전적으로 불가능해져 버린다.

망망(茫茫)한 대해(大海)에 외줄기 푸르른 감성의 낚싯줄을 드리워놓고, 좀처럼 미끼를 물지 않고 요리조리 피해서 달아나버리기만 하는 날렵한 시어(詩魚)를 낚아채 올리기 위해, 에르바르트 뭉크의 ‘절규’에 등장하는 그림 속 인물처럼, 온종일 양손으로 귀를 콱 틀어막고 공포의 시선으로 묵묵히 땅바닥만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그런데도 이 능글맞은 위인은 끈질기게 다가와서, 내 감성을 교란시켜 보려고 온갖 시도를 다해보고 있었다. 군데군데 수북이 쌓아놓은 신전의 석재 파편더미 속에 은밀히 감추어 두었던 그의 보물 1호인 해골(骸骨)을 꺼내 들고 와서는, 석상처럼 뻣뻣하게 굳은 표정으로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있는 내 눈앞에 징그럽게도 바짝바짝 다가들었다. 그리고는 땡볕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폐허의 신전 한복판에서, 쉬지 않고 군데군데 조금씩 사그러 부서져 나간 해골바가지를 내 눈앞에 슬쩍 들이댔다 멀어졌다 하기를 수차례나 반복해대더니, 드디어 누런 금이빨을 번쩍이며 시종일관 능글맞게 웃어대던 아랍인도 지쳐버렸나 보다.

▲ 엘레판티네 섬의 누비안 소녀. ⓒ수해

몇 번이나, 나에게서 깜짝 놀라며 경악하는 표정을 기대하고 다가서던 이상한 인물이 마침내 자포자기해 버린 채 알아듣지 못할 언어로 심한 욕설을 뇌까리며 저만 치로 사라져 버린 지도 한참이나 지나버린 후였다. 낡은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머루 알처럼 빛나는 눈동자를 반짝이며 나에게 다가온 누비안 소녀는 앙증맞은 음성으로 송알송알 속삭였다.

“하이, 도깨비~. 당신 혹시 크눔 신전의 나일로 미터(Nilometer, 나일 강의 수위 측정표)를 찾고 있나요?”

양손에 해골바가지를 치켜들고 기분 나쁜 미소로 집요하게 추근덕 거리던 인물 때문에 너무나도 지쳐버린 나머지, 얼른 대답 하지 않고 그냥 고개만 두어 번 끄덕이며 긍정의 표시를 보내자, 소녀는 망설이지 않고 냉큼 쪼르르 달려오더니, 곧장 내 손목을 잡아끌고 강변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말했다.

“난, 사실 며칠 동안 계속 숨어서 당신을 지켜보고 있었어요.”
“어디서? 왜 그때는 아는 척하지 않았던 거지?”
“그건 당신이 걸핏하면 사진을 찍고 돌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우리 누비아인들은 사진을 찍으면 혼(魂)이 빠져나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여행자들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거든요.”

빈번하게 이 섬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영향을 받아서일까. 겨우 초등학교 1~2학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소녀는, 능숙하지는 않으나 영어를 곧잘 구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넌 왜 아까부터 자꾸 나더러 도깨비라고 부르는 거지?”
“아, 그건 이 마을 사람들이 함부로 사진 찍고 돌아다니는 외국인들이 나타나면, 어서 빨리 숨으라는 신호를 보낼 때 사용하는 은어(隱語)예요.”

나를 두고 누가 도깨비라고 부르던지 해골바가지라고 부르던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기에는 암튼 난 너무나도 지쳐있었다. 그래서 토끼 같은 누비안 소녀의 조그만 손에 질질 이끌려서, 마지못한 걸음을 놓아 크눔 신전의 나일로 미터를 찾아 강변으로 향했다.

▲ 크눔 신전의 계단식 나일로 미터와 누비아 마을의 오지 물 항아리. ⓒ수해

다채로운 문양의 석조 파편들이 널브러져 있는 폐허의 신전 유적지를 돌고 돌아서 나일로 미터를 찾아가는 길섶에는, 그 옛날 화려했던 엘레판티네 섬의 전성기를 묵시적으로 웅변해 주는 고대의 유물들이 도처에 산적해 있었다.

경쾌한 걸음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앞장서가는 누비안 소녀를 따라서, 나일로 미터가 새겨진 90여 개의 가파른 돌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아스완 하이 댐이 완공된 이후로 범람이 멈춰버린 나일 강의 생태변화를 고스란히 반영해주기라도 하는 양, 마른 물이끼가 덕지덕지 묻어있는 가파른 통로 속으로는 건조하기 그지없는 열대의 바람만 사정없이 불어 닥쳤다.

나일 강의 범람을 기원하는 고대 아랍어로 쓰인 돌계단 옆의 다양한 기도문들을 살펴보면서, 한동안 강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 더위를 식히다 보니, 잠시 어디론가 사라지고 안 보이던 소녀가 다시 어떤 청년과 함께 나타났다. 누비안 소녀와 함께 나타난 청년은 다짜고짜 나에게 물었다. 저녁에 암굴분묘에서 남쪽으로 약 2km 떨어진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세인트 시메온 수도원(St. Simeon Monastery)에 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혹시 동행하지 않겠느냐고.

그래서 얼른 누비안 청년에게 “혹시, 그리스도 단성설(單性說)을 신봉하는 콥트교도(Coptic Christians)냐?”고 정중하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누비안 청년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독실한 이슬람교도이지만, 에티오피아에서 온 콥트교 인들이 방금 누비아 박물관의 초기 기독교 성화(聖畵)를 관람하고 나서, 저녁에 언덕 위의 콥트 수도원으로 단체순례를 떠나는데 길 안내를 맡기로 하였다고 말했다.

▲ 언덕 위의 아가 칸 묘와 세인트 시메온 수도원. ⓒ수해

7세기에 처음 설립되었다가 10세기 무렵 재건된 세인트 시메온 수도원은, 맨 처음 이 지역의 성자였던 '안바 하드라'를 위해 건립된 사원이었으나, 후에 아랍제국이 침범하였을 때 콥트교 선교사들이 은신처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서서히 기독교 수도원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아스완의 여름풍경을 유난히도 사랑했던 이슬람 이스마일파의 최고 권력자 아가 칸(Agha Khan)의 묘(墓)를 지나서, 시종일관 경건한 자세로 묵주기도(黙珠祈禱)를 드리면서 걸어가는 순례자들의 행렬에 끼어, 머나먼 세인트 시메온 수도원을 향하여 걸어가는 길. 어둠 속에서 모가지가 부르트도록 울어 예는 부엉새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저, “괴로웠으나, 심히 행복했던 사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허락되었던 숙명의 나무 십자가가 상징하고 있는 수많은 고난의 표상들이 눈앞에 펼쳐지면서, 또다시 무뎌져 가던 나의 감성에 사정없이 회초리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수해 (기행문학가)
운문사 강원을 졸업하고, 오랫동안 세계 여러 나라의 명상사원과 문화유적지를 순례하다가, 동국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지은 책으로 시집《산 두고 가는 산》과 동아시아 기행 에세이《예정된 우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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