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종교의 향기-3] 나무여성인권상담소 김영란 소장

나무여성인권상담소는 지난해 12월 29일로 문을 연지 꼭 4년이 되는 불교계 첫 여성인권단체다. 여성 불자들과 함께 하겠다는 서원으로 시작해 그간 성폭력 피해자 및 가해자 상담, 중고등학교의 성폭력 예방교육 등 다양한 상담과 교육 활동을 펼쳐왔다. 김영란 소장은 성폭력 피해자의 치유에 “‘나’라고 규정할 수 있을 만한 것이 없다”는 불교적 관점이 기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 나무여성인권상담소 김영란 소장 ⓒ문양효숙 기자

“피해자가 자신의 경험을 재구성해 몸이 더렵혀진 것이 아니라 ‘폭력’을 당한 것임을 알게 하는 회복이 중요합니다.  나아가 명상과 종교적 차원의 깨달음을 통해 보다 깊이 있는 차원의 치유가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면 ‘더러워진 나’도 없으니까요.”

이런 생각으로 상담소에서는 꾸준히 명상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흔히 위빠사나 수행이라 불리는 MBSR(Mindfulness-Based Stress Reduction)을 비롯해 매주 수요일 별도의 명상모임을 하고 있다.

피해자 상담이 ‘치유와 회복’에 중심을 두고 있다면 가해자 교육과 상담의 중심은 ‘변화’다. 교도소에서 집단 교육을 진행하는 김 소장은 “교육을 통한 가해자들의 변화에 회의적인 시선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몇 십 년을 살아온 사람들이 몇 십 시간의 교육으로 바뀌길 바라는 것 자체가 욕심”이라고 말한다.

“그들을 ‘내가 알고 살아온 것이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하고 흔들어 놓을 수 있기만 해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보통 성에 대한 통념이 강할수록, 성 역할 고정관념이 강할수록 성폭력 가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요. 그런데 성에 대한 통념은 오랜 시간 사회에서 학습된 결과물이죠.”

가부장적인 사회라는 견고하고도 거대한 공간에서 한 인간은 거기에 세팅된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마련이니 흔들어 놓을 수만 있어도,  ‘이것은 아니지 않은가?’ 반문할 수만 있어도 효과는 있다는 것이다. 영구적으로 전자발찌를 채우고 영구적으로 격리시킬 수 없다면 말이다. 김 소장은 ‘화학적 거세’도 성폭행의 본질을 오랜 시간 형성되어 온 가부장제 사회 때문이 아닌 ‘욕구’로 보는 데에서 출발한다고 설명한다. 결국 한 개인의 변화, 혹은 치유는 사회 구조의 문제와 분리시켜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라면서.

일상에 널리 퍼진 성폭력,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내가 당한 일은 그런 게 아니다'

김 소장은 최근 언론에서 아동 성폭력이 많이 보도 되면서 “저렇게 심한 것만 성폭력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사실 아동 성폭력이 급격히 증가한 게 아닌데 언론이 선별적으로 보도하다 보니 일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성폭력에 대해서는 ‘뭘 그 정도를 가지고?’ 라고 하찮게 생각하게 되는 거죠.”

나무여성인권상담소에서 진행하는 가해자 개별상담 중에는 고소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피해자들이 교육을 원한 경우도 있고 가해자 스스로가 상담을 필요로 한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가해자들은 대부분 머리로는 ‘그런 행동은 나쁘다’고 인지하고 있다. 다만 자신들은 물리적 압력을 가한 것이 아닐 뿐 더러 ‘호감의 표시’였기 때문에 ‘넘어가 줄 수도 있는 문제’ 정도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일상에서 이런 일들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고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는 피해자들이 훨씬 더 많다. 이 때 피해자들에게는 “나에게 닥친 일은 ‘그런 일’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가해자들에게는 “나는 그런 사람(성폭력 가해자)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래서 김 소장은 “다양하고 섬세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중요한 것은 '해석'과 '원뜻', "너와 나의 구별없이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존중하라"

성폭력 상담과 더불어 불교 안에서 여성의 인권을 고민하는 김 소장에게 ‘여인불성불’(女人不成佛, 여성의 몸으로는 성불할 수 없고 다음 생에 남성의 몸으로 성불해야 한다), ‘비구니 팔경계’(비구니가 지켜야 할 여덟 가지 계율, 100세의 비구니라 할지라도 신참 비구에게 절을 해야 한다는 조항 등을 포함하고 있다)등 기록된 대로라면 성차별이 분명한 불교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물었다. 김 소장은 “중요한 것은 원뜻” 이라고 답했다.

“불교에서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생명 그 자체로 존중하고 너와 나의 구별이 없다고 하죠. 부처님은 여성이 인간의 범주에 들지 않았던 시절에 여성도 출가자로 수행의 삶을 살도록 하셨어요. 하지만 불교가 종교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가부장적 사회의 역사관이 많이 개입되었겠지요. 그러니 중요한 것은 ‘해석’이 아닌가 해요. 문구 자체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원래의 뜻으로 해석해야겠지요.”

그러나 김 소장은 총무원장 선거와 관련해 비구니 스님들에게 피선거권이 없고 수적으로는 5000여명으로 비구 스님과 비슷한데도 선거권은 현저히 적은 문제와 출가자와 재가자 사이의 위계적 문화 등을 거론하며 “현실적인 불평등 문제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김 소장은 차분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자들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여성들이 조금만 깨이면 출가자들의 불평등 문제에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비구니 스님들이 ‘나의 문제’로 인식하고 들고 나오는 게 맞지요. 하지만 종교라는 틀이 너무 견고하다면 주변 여성들이 더 목소리를 내는 게 좋겠다 싶어요. 우린 걸리는 게 없으니까요. 재가 여성들이 비구니 스님들의 힘이 될 필요가 있어요. 여성들이 공동으로 해야 하는 일인 거죠. 대다수인 여성들이 깨이지 않으면 오히려 그 체제를 더 두둔할 수 있어요. 사찰에서 나이든 보살님들이 더 위계적이시기도 하거든요.”

신행(불교에서는 ‘신앙생활’ 대신 ‘신행’이라고 쓴다)에서 문화를 바꾸어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김 소장은 얼마 전 양성평등 사찰가이드북을 만들었다. 제작 과정에서 사찰 내 성차별 피해사례를 모으기도 했다. “결국 사부대중(불교에서 출가와 재가, 성별에 따라 불자들을 구분하는 말로 비구니와 비구는 출가한 여성과 남성, 우바이와 우바새는 재가 여성과 남성을 일컫는다)이 함께 가야 하니까요. 문화를 바꿔나가는 게 중요해요”

정토회를 만나면서 시작한 불자의 길, "모든 것은 내가 원한 것이다"

1990년대 말, 마음이 힘들었던 때 우연히 정토불교대학을 접하며 불자가 된 김 소장은 정토회의 수련과 초창기 법륜 스님의 100일 즉문즉설에 함께 했다. 대학교수를 목표로 달려왔던 김 소장은 그 시간을 거치며 “대학교수가 아니어도 괜찮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가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고 결정했다. 그는 모든 건 우연이 아니라 ‘자신이 원한 일’이라고 했다.

“제가 원하니까, 그 때 정토회를 만났을 거예요. 좋은 일도, 고통스러운 일도 모두 제가 원했던 일이예요. 그 고통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거구요.”

그러면서 김 소장은 10여 년 전, 법륜 스님의 녹취를 풀면서 마음에 깊이 자리 잡은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산에 올라갈 때 나는 좀 거뜬한데 옆 사람 짐이 무거워 보이면 들어줄 때가 있잖아요. 나는 그냥 내가 할만 해서 한 거니까 정상에 올라갔을 때 상대방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을 필요가 없죠.”

그는 그렇게 바라지 않고 가보고 싶다고 했다. 결심과 맹세보다는 할 만한 일을 하면서 말이다. 나무여성인권상담소의 ‘나무’는 불교에서 부처에 ‘귀의(歸依)’함을 뜻하면서 동시에 성폭력 피해자 여성들에게 나무 그늘과 같은 쉼터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담은 이름이다. 그 이름처럼, 연구소는 오늘도 자연스럽고 가볍게, 하지만 깊이 있는 뿌리로 상처 입은 이들과 불평등으로 어그러진 세상의 곁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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