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이야기-백동흠]

태풍, 해일 막아주는 큰 방파제, 그레이트 베리어 섬

한 해의 일정을 내려놓고 연말을 맞아 떠나는 3박 4일 장기산행이 시작됐다. 19명의 산행 회원들과 함께 실링크 여객선에 몸을 싣자 네 시간 반 거리의 그레이트 베리어 섬을 향해 뱃고동이 부-웅! 울린다. 뱃전에 검푸른 물결이 부서져 우유빛깔 새하얀 포말로 뿜어 오르니 기분도 덩달아 한껏 치솟아 오른다. 하우라키 만을 서서히 벗어나 여러 작은 섬들을 지나면서 망망대해에 들어선다. 오클랜드 앞쪽으로 란지토토 섬, 왼쪽 조금 지나 와이헤케 섬, 오른쪽 멀리 코로만델 반도가 오클랜드를 보호하듯 병풍처럼 떡하니 자리 잡은 채 지키고 있다. 하우라키 만으로 휘몰아 덮치는 해일과 태풍을 막아주는 방파제들이다.

▲ 그레이트 베리어 섬으로 향하는 여객선. ⓒ백동흠

멀리 세 시간여 지나자 마지막 보호 장벽이 길게 뻗친 채 버티고 있다. 가장 큰 방파제 섬이다. 바로 우리가 가는 그레이트 베리어 섬이다. 뉴질랜드 원주민 마오리들은 이 섬을 멀고 긴 흰 구름의 터전 ‘아오테아’ 라고 불러오고 있다. 면적 285㎢로 여의도의 33배, 제주도의 1/6 크기다. 인구는 850여명으로 오클랜드시 행정 관할지역이다. 그레이트 베리어 섬! 피츠로이 포구에 닿으니 산골 어촌 마을의 개구쟁이 어린 아이들이 여름방학을 맞아 물장구치고 헤엄을 치며 놀고 있다.

윈디 캐년과 홉슨 마운틴

새벽하늘에 하얀 은빛 보석과 은하의 강물이 흘러 넘쳐 온 산에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산꼭대기 쪽으로 발길을 저벅저벅 옮기니 온갖 산새들이 아침쾌청 기지개를 펴며 숲 속 작은 음악회를 열고 있다. 꼭꼭, 까악 까악, 꾸르르 꾸르르, 까꿍까꿍… 외딴섬 깊은 산속 한적한 곳에서 아침 기운이 온 사방 지천으로 피어있는 하얀 마누카 꽃에 이슬로 내려앉아 흠뻑 적시고 있다.

아침을 차려먹고 점심용 삼각 김밥을 챙겨서 그레이트 베리어 섬의 백미 윈디 캐년으로 향한다. 산 입구부터 분위기가 내륙의 산과 다르다. 마치 아바타 영화 배경으로 나온 중국 장가계에 들어선 기분이다. 뾰쪽한 산과 산 사이에 기암괴석 봉우리가 우뚝 솟아올라 있다. 계곡 낭떠러지가 한없이 깊숙하게 내려 보이니 차마고도 같다고 말한 한 회원의 표현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산등성을 지나니 길 양편으로 낮은 수목과 마누카꽃이 잔잔하게 평화의 물결을 이룬다. 서편제에서 목청껏 소리를 토해내며 걷는 오정혜가 떠오른다. 서서히 안개가 산등성 자락을 감싸고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분무하듯 수분을 품어낸다. 가파른 곳에 만들어 놓은 1100 여개의 나무계단을 밟고 올라가는데도 힘이 든다. 길 양편에서 안쪽으로 뻗은 나무줄기들이 우산처럼 받쳐주는가 싶더니 어느새 안개 물기 머금은 나뭇가지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백동흠

홉슨 마운틴 정상에 오르니 나무로 만든 전망대 탑이 나온다. 산꼭대기 구름과 안개가 온 세상을 덮다 보니 신령한 기운의 세계에 오른 느낌이다. 산 아래 좋은 경치를 구름 안개가 가려 못 보게 되어 섭섭도 하지만 또 나름대로의 운치가 있다. 준비해온 점심, 삼각 김밥을 먹으며 촉촉한 기운을 함께 들이 마시니 그 맛도 별미다.

이렇게 한번 왔다 가기는 너무도 아쉽다고 다음날 해가 쨍쨍 뜨는 가운데 열성 전사(?) 여섯 명이 다시 오르고 만다. 한 번 더 올라와 내려다보니 비행기에서 본 것처럼 산과 바다 들판이 그대로 360도 환상적인 파노라마다. 따가운 햇볕을 받으며 빠른 걸음으로 올라오다 보니 땀으로 속옷, 겉옷이 몽땅 젖어 버렸지만 중간 쉼터에서 산과 산 사이로 불어오는 산골바람이 폐부를 얼리는 시원함은 어디에도 견줄 수가 없다. 좁은 마음이 넓은 마음으로 확 뚫린다.

큰 것 한 가지 좋으면 작은 것 열 가지 불편도

성수기 휴가철에는 숙소 정하기가 만만치 않다. 6개월 전에 미리 준비한 터라 그나마 섬 속에서도 깊은 산속 민박집을 구하게 된 것이다. 우선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니 지붕위에서 태양열 에너지를 모아 두었다 사용하는데 부족할 때는 자가 발전기를 돌린다. 나무숲이다 보니 밭에서 산딸기를 따먹을 수 있어 좋지만 모기와 모래파리 극성쯤도 받아들이게 된다. 경사진 비포장 좁은 길을 털털거리며 달릴 때는 옛날 시골 산길 다니던 추억을 되짚어 보는 여행이기도 했다. 저녁 식사 후 일정을 마치고 도란도란 얘기하는 속에 총총한 별들과 나눔도 깊어가고 밤도 사위어갔다. 낯선 곳으로의 일탈, 하고 싶은 큰 일 하나를 하려니 다소 불편한 작은 것 열 가지를 받아들이게 되는 게 여행인가 싶다.

ⓒ백동흠

외딴 섬이 되어 보는 것

일상을 떠나 낯선 외딴곳에 있다 보니 ‘예기치 않은 여정- 호빗’이 기다리고 있었다. 문명과 단절된 곳에서 사흘 밤 나흘 낮이 세상과 소통을 잠시 중단하는 장벽이 되기도 했다. 내 마음속에 욕심, 인색, 교만이 깃들지 못하도록 쳐둔 저지선으로 나를 깊숙이 바라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나는 나 이외의 가족이나 다른 사람에게 닥치는 불편함과 어려움을 막아주는 장벽 ‘그레이트 베리어 섬’이 되어 주고 있는지….

불현듯 내 자신이 육지와 멀리 떨어져 망망대해 가운데 떠 있는 작은 섬이 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한 해를 마칠 무렵 이렇게 외딴 섬이 되어 보면서 숨 고르기도 하고 충전도 하면서 새해 나아갈 방향을 다시금 짚어도 본다.

백동흠 (프란치스코)
뉴질랜드에서 택시 기사로 일하며 틈틈이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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