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나의 주말 영화] 아무르(Amour), 미카엘 하케네 감독, 상영중

발터 벤야민은 20세기 들어 죽음을 경험하지 못하는 건물이 점점 늘고 있다고 했다. 인간의 생명이 의료와 행정기구 같은 근대 제도를 통해 관리되면서, 누군가가 임종을 맞이한 공간에서 살아가고 또 죽는 일이 자연스럽지 못한 삶을 예고한 말이었다. 현대의 죽음은 일상적 장소,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저기’ 서 있는 고층건물에서 별도로 구획 ‧ 관리되는 것이다. 서울 같은 대도시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종합병원 뒤편은 부모가 죽음을 맞이했고 또 자신이 언젠가 시신으로 누워있을 공간이다. 미카엘 하케네의 영화 <아무르>는 이러한 삶을 거부한 노년의 일상을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

제도로써 관리되는 죽음의 방식을 거부하다

 
음악가로 일하다 은퇴한 부부 안느(에마뉘엘 리바 분)와 조르주(장-루이 트랭티낭 분)는 파리에서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물질적 곤란이나 가족 간 불협화음 같은 것이 이들을 위협하는 것은 아니다. 외동딸 에바(이자벨 위페르 분)는 바람기 있는 남편, 약간의 경제적 문제를 안고 있지만 삶의 방식을 바꿔야 될 정도는 아니다. 문제는 어머니이자 아내인 안느가 순환기 질환을 앓고, 수술 실패 후 반신마비가 왔다는 사실이다.

노년기의 활동 장애는 급격한 건강상 문제를 야기한다. 혼자 거동할 수 없기에 움직이지 않는 시간이 늘게 되고, 이는 육체와 정신의 쇠락을 촉진한다. 더구나 안느는 독립심과 자존심, 그리고 병원에 대한 공포심이 상당히 강하다. 그녀는 조르주에게 절대로 병원에 보내지 말아달라고 요구한다. 따라서 그녀의 육신을 돌보고 관리하는 것, 그녀의 정신적 몰락을 견뎌내는 것은 온전히 남편 조르주의 몫으로 남겨진다. 영화는 그의 힘겨운 일상과 파국을 섬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하네케 영화는 제삼자의 논평이나 틈입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아무르>의 시간 역시 안느와 조르주의 선택에 왈가왈부가 불필요한 지점에서 흘러가고 있다. 그들의 선택은 그 자체로 옳았다. 그러나 영화가 제시하는 모든 것을 그대로 수긍하고 받아들이기도 어렵다. 왜일까? 답은 간단하다. 영화가 노부부가 처한 상황을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관객인 우리의 것으로 여겨지게끔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르>는 외화면을 활용한 오프닝 장면 2개를 통해 영화 속 인물과 우리를 직접 대면케 한다. 첫 번째는 외부인이 강제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장면이다. 카메라가 이를 정면의 아이레벨 프레임과 롱숏으로 비추고 있어 이 난입이 관객의 공간에 이루어졌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다음은 상젤리제 극장에서 열린 연주회 장면이다. 카메라는 무대를 보여주지 않고 객석만 비춘다. 그리고 사운드로 피아노 연주가 시작됨을 알린다. 이는 안느와 조르주가 외화면을 통해 관객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감각을 연출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과 입장을 바꾸어 보면서 저들의 선택이 최선이었을까를 묻게 된다.

하케네 감독이 보여주는 노년의 일상

안느와 조르주를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는 주체성과 독립심이다. 이들은 타인의 동정과 관심을 단호하게 거절한다. 안느는 제자의 편지에 그녀의 병세에 대한 안타까움이 표현되어 있자, 그가 보내온 음악을 중단시킨다. 조르주는 딸과 사위의 관심을 간섭과 참견으로 여긴다. 그는 예고 없이 방문한 딸에게 침실 문을 밖에서 잠근 일에 대해 사과하면서 말한다. “너희들이 마치 훈계하려고 오는 것 같아 화가 났어.” 일상의 고통이 당사자에게 주는 무게를 그 바깥의 사람이 제대로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를 이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조르주는 아내의 상황에 완전히 감정이입이 될 정도로 그녀를 사랑한다. 따라서 원하지 않았는데 아내에게 거울을 들이미는 젊은 간호사는 묵과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70대의 노감독 하케네는 관객에게 노년이란 거울을 멀리하고 싶은 시간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조르주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간호사를 해고해 버린다. 하지만 늙음을 모르는 간호사로서는 이러한 방식의 해고가 억울하기만 하고, 이들은 서로 욕설과 저주를 퍼부으며 관계를 끝낸다. 이 같은 신(scene)을 마주하면서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차단할 정도의 주체성은 과도한 것이 아닌가 묻게 된다.

근대는 전범이 없는 시대이다. 전통과 단절된 시간을 살아가는 인간은 모든 기준을 자신에게서 구해야 한다. 그 결과 주체성은 근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필수불가결한 원리가 되었다. 문제는, 주체의 탄생과 동시에 그 경계 밖으로 타자가 발생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노년의 삶을 사는 이들에겐 젊음 자체가 타자이다. 보살핌을 받는 사람에게는 자신을 돌보는 존재가 타자일 수 있다. 안느는 조르주에게 끊임없이 사과할 일이 생기고, 아름다웠던 삶은 길고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어 버린다.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사르트르는 타자가 바로 지옥이라고 말했다. 안느의 변화에 따라 삶이 지옥처럼 변해버리자, 조르주는 선택의 시간이 다가옴을 느낀다. 그때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오고, 조르주는 이 생경한 타자에게 다가간다.

주체와 타자의 대립적 시간 너머를 꿈꾼다

근대성의 폐해를 피해 전근대적 전통으로 되돌아가는 일은 불가능하다. 근대는 하나의 역사이자 전통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안느가 남은 자를 위해서 근대적 기구에 더 적극적으로 의탁했어야 한다는 교훈을 찾는 것도 무리이다. 근대적 제도가 인간을 얼마나 비인격적으로 대하는지 우리 모두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냉철하고 아름다운 노년의 기록을 보면서 영화가 볼거리를 넘어 하나의 철학이 되었음을 다시금 깨닫는다.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다. 그리고 영화의 시간은 죽음을 향해간다. 그 끝에는 근대의 파국, 비극만이 놓여 있는 것일까.

근대의 건물에 관한 이야기로 글을 열었다. 죽음을 모르는 건물이 생명력을 잃고 재테크의 수단으로 치부되는 것은 동서양에 공통된 일인 것 같다. 안느를 찾아온 에바는 인플레이션에 부동산이 가장 안정적이라 매물을 찾고 있다는 말을 흘린다. 그리고 영화는 자신의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온 에바의 시퀀스로 끝난다. 이제 그녀의 것이 되었을 집은, 부모의 사랑과 죽음을 생생히 목격한 장소이니 뭔가 다른 순간들이 그곳에 기입되기를, 부디.


 

 
 

진수미(카타리나)
시인, 한국문학과 영화를 전공으로 삼고 있다. <달의 코르크마개가 열릴 때까지>, <시와 회화의 현대적 만남>을 썼다. 가톨릭청년성서모임 출신. 작은형제회 <평화의 사도>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가톨리시즘이 담긴 시를 같은 지면에 소개했다. 덧붙여, 시는 영혼이고 영화는 삶이다. 펄프 향 풍기는 ‘거기’서 먼지와 정전기 날리는 ‘여기’로 경로 이동 중. 덕분에 머리는 산발이지만 약간 더 명랑해지고 조금 덜 외로워졌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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