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0일 성가정 축일 : 루가 2, 41-52, 골로 3, 12-21.

오늘은 성가정 축일입니다. 교회에서 성가정 축일을 거행하는 것은 나자렛 예수, 어머니 마리아와 양부 요셉이 이룬 가정을 역사적인 실제 가정으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가정 축일은 그런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성가정에 대한 공경은 이미 초대교회 때부터 존재해 왔습니다. 그리고 중세에 이르러 대중신심으로 확대 발전했습니다. 교회에서 성가정 공경이 전례 안으로 편입된 것은 1893년입니다. 당시 교황 레오 13세는 성가정 축일을 제정하면서 주님공현 대축일(1월 6일) 후 첫 주일에 거행하도록 규정했습니다. 정확히는 1월 7일-13일 사이의 주일을 말합니다. 그리고 1921년 교황 베네딕도 15세는 이를 교회의 공식 축일로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성가정 축일은 한 번도 의무축일로 지정된 적이 없습니다. 1917년 교회법 제1247조에는 10개의 의무축일을 지정해 두었는데, 이는 현 1983년 교회법 제1246조에서도 그대로 계승하고 있지만 성가정 축일은 이 의무축일에서 빠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가정 축일이 주일에 거행토록 했기에 별도로 의무축일로 지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 성가정 (후안 구티에레즈)
성가정 축일이 오늘날처럼 성탄 대축일 직후 첫 주일로 옮겨 거행한 것은 1969년입니다. 1969년 전례력 개혁에 따라 성가정 축일은 12월 26일-31일 사이의 일요일에 거행토록 했습니다. 그리고 만일 성탄 대축일이 주일인 경우, 성가정 축일은 12월 20일에 거행하도록 규정했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우리 교회는 성탄의 기쁨과 더불어 성가정 축일을 거행합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비추어 보면 마냥 기쁜 마음으로 이 축일을 맞이해도 되는지 의문이 듭니다. 교회에서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오늘, 사회에서는 가정이 무너지는 소식들이 들려오기 때문입니다.

성탄절 당일을 포함하여 성탄 전 일주일 새 네 명의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성탄을 나흘 앞둔 지난 21일 정리해고 되었다가 복직 한 후 다시 무기한 휴업상태로 내몰린 부산 한진 중공업의 노동자가 죽음으로 내몰렸고, 다음날인 22일 오전 민권연대 활동가에 이어, 오후에는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자의 죽음으로 비보는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성탄절 당일 한국외대 노조지부장이 자신의 삶을 버렸습니다.

성가정 축일은 우리의 기억을 또 다른 시간으로 되돌려 놓습니다. 2008년 연말, 우리는 성탄의 기쁨을 만끽하며 성가정 축일을 지냈던 그 순간, 용산 재개발 제4구역에서는 소상인들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세상만큼이나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서 마지막 희망의 끈을 부여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맞이한 2009년 새해 아침, 이명박 대통령은 신년 국정연설을 통해 가족의 소중함에 대해 역설했습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를 위하는 따뜻함입니다...위기 때 가족보다 더 강한 버팀목은 없습니다...우리의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 쌓이는 곳은 역시 가족입니다. 따뜻한 가족, 따뜻한 이웃이 있는 한 우리는 이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정부도 국민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따뜻한 국정을 펼치겠습니다. 민생을 돌보고, 서민의 삶의 질이 위협받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가족의 소중함과 사랑을 역설했던 국정연설 후 보름 남짓 지난 2009년 1월 20일, 자신들의 가정을 지키고자 삶의 한파와 맞섰던 용산 철거민들은 결국 죽음으로 내몰렸습니다. ‘따뜻함’ ‘추억’ ‘서민’이라는 말로 표상되었던 ‘가정’은 곧 ‘법치의 확립’이라는 미명으로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최근 성탄 무렵에 스스로 이승을 등진 네 분의 노동자, 그리고 폭력과도 같은 정부정책 앞에서 죽음으로 내몰린 용산 철거민들 역시 한 가정의 가장 또는 가족의 구성원이었을 것입니다. 성가정 축일에 이 분들을 떠 올리는 이유는 우리가 공경해 마지않는 성가정 역시 세상에서 소외된 채 시대의 어려움을 고스란히 떠안고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노동자 아버지와 미혼모 어머니, 지명수배자 아들이 꾸린 성가정 

예수, 마리아, 요셉 성가정은 오늘날 우리 가정만큼이나 순탄치 않은 형편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가정’이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조건을 지닌 가정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많은 결점을 지닌, 그리고 온갖 불행의 그림자에 드리워진 가정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성가정은 당시의 기준으로 ‘빈곤층’에 속했던 가정이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정결례 당시 제단에 드려야할 재물의 규정 (레위 12,8)에 따라 “양 한 마리를 바칠 힘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기준인 “산비둘기 한 쌍” 또는 “집비둘기 두 마리” (루카 2,24)를 바쳤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 이집트로 피신
양아버지 요셉은 평생을 남의 일을 거든 목수로 사셨습니다. 요즘 표현대로 한다면 목수 노동자, 즉 막일꾼의 삶이었지요. 예나 지금이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막일 노동자의 삶은 고단하기 그지없었을 것입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당시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처녀잉태를 감수한 여인이었습니다. 예수의 탄생으로 면모를 갖추게 된 성가정은 출발부터 당시의 법정신으로는 위법, 불법의 선상에서 출 발한 셈입니다. 그리고 이는 마리아의 약혼자 요셉의 오해를 불러 파혼의 위기까지 자초했습니다. 말년에는 자식을 십자가형으로 떠나보낸 채 살아야 했습니다.

아기 예수는 태어나자마자 ‘지명수배자’가 되어 권력을 피해 이곳저곳으로 피신 다녀야 했습니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에 대한 축복은 이교도인 동방박사들과 목동들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성탄의 대가는 무죄한 어린이들의 학살로 이어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볼 수 있듯이, 어린 예수님의 기행(奇行) 역시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부모의 속을 뒤집어 놓을 만한 행동을 저지르고도 버젓이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아이였습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찾아 사흘이나 헤매고 다닌 부모에게 보인 예수의 태도에 어머니 마리아는 ‘칼에 꿰찔린’ (루카 2, 35) 듯한 영혼의 아픔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성가정을 ‘성스럽다’고 하는 데는 구세주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 그리고 성 요셉이 한 가정을 이루어 함께 살았다는 사실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어딘지 많이 불완전한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 불완전한 가정을 ‘성스러운 가정’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런 여러 가지 현실적 어려움에 봉착한 삶의 여건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자신들의 소명으로 수용한 ‘받아들임’의 태도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받아들임’의 태도는 단순히 그 순간만을 의미하지 않고, 이후 이 가정 구성원들인 예수 ‧ 마리아 ‧ 요셉의 삶 안에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예수 ‧ 마리아 ‧ 요셉의 성가정을 기념하는 오늘, 노동자들과 용산참사 희생자들 가정을 떠올리는 이유는 그분들의 남겨진 가족들의 ‘받아들임’의 태도와 이후의 삶이 결코 성가정의 삶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장 또는 가족의 구성원의 비참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이분들은 그 현실에 마냥 주저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일례로 용산참사 당시 자신의 지역이 아닌데도 연대를 위해 남일당에 올랐다 처참하게 생을 마감한 윤용헌님과 마지막까지 그의 곁을 지켰던 아내 유영숙님의 이야기를 되돌아봅니다. 그리고 유영숙님은 4년이 지난 지금, 다른 유족들과 함께 삶의 자리에서 쫓겨 난 이들을 만나 위로하며 보듬고 있습니다.

자신의 가족에 닥친 불행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 결국 그 ‘받아들임’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삶 안에 고스란히 녹아내고 있는 유영숙님의 삶을 통해 우리는 어머니 마리아의 삶을 만납니다. 십자가형으로 죽은 이의 어머니가 그 엄혹한 세상에서 얼마나 억울하고 또 힘겹게 살아가야 했을까요? 또 아들의 뜻을 이어 살기 위해 그녀는 또 얼마나 강건히 삶을 지켰내야 했을까요?

결핍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예수와 마리아, 그리고 요셉이 이뤘던 성가정의 의미는 이렇듯 시대를 관통하는 삶의 현장에서, 또 다른 소외된 인생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에서 하느님의 뜻과 삶의 의미를 받아들이고 나누는 구체적인 모습으로 오늘의 우리에게 되살아옵니다.

성가정 축일인 오늘, 더 없는 어려움에 빠진 이웃 가정에도 성탄의 기쁨을 전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김홍락 신부 (가난한 그리스도의 종 공동체)
교부학과 전례학을 전공했고, 현재 필리핀 나보타스(Navotas)시 빈민촌에서 도시빈민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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