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 강한]

맹추위가 몰아치는 고달픈 계절. 세상 가장자리로 밀려난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 너무 많이 들어서일까? 위령성월 지난지도 한참 됐는데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된다.

지난 새벽에는 지독한 악몽에 시달리기까지 했다. 꿈속의 나는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고, 결국 자살하기로 결심했다. 마침 자살할 장소와 수단을 제공하는 ‘기업’을 알게 됐고, 나는 그 회사에 ‘자살 보조’를 의뢰했다. 나는 회사가 빌려준 작은 콘도 같은 공간에 묵게 됐고, 큰 고통 없이 서서히 죽게 해주는 약까지 배달받았는데, 마지막 순간에 두려움에 떨며 울음을 터뜨리고 결국 자살을 포기했다. 처음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지만 막상 죽음을 앞두니 너무나 두려웠다.

진정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삶을 믿나요?

죽음 뒤에는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 가톨릭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요즈음의 나야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고, 주일 미사 때마다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하고 고백한다. 그 믿음이 얼마나 튼튼한지는 따져볼 일이지만.

돌이켜보면 6~8년 전 군 복무 중 여러 사람의 죽음을 직간접적으로 접했다. 무엇보다도 2005년 6월 19일 새벽 여덟 명의 젊은 목숨을 앗아간 연천 GP 총기 난사 사건의 충격이 컸다. 일하는 지역과 조건이 다르지만, 나와 같은 사병 신분에 나이도 비슷한 사람들의 참혹한 죽음은 내 마음을 검붉게 물들여 놓았다. 그 무렵 나는 일기장에 이 사건에 대한 생각을 여러 번 적었는데, 그 중에는 “죽음 뒤에 남는 것은 싸늘한 시신뿐”이라는 말도 있다. 지금의 나는 이 냉정한 단언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달아나 있을까? 혹시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철학자 러셀은 ‘인간은 죽은 뒤에도 존재하는가’라는 글에서 이렇게 적고 있는데,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구조로서의 뇌는 사람의 죽음과 함께 해체되어버리며 따라서 기억 역시도 해체된다고 예상할 수 있다. …(중략)… 죽음으로 뇌 구조가 완전히 파괴된 다음에도 정신이 계속될 가능성은 거의 희박한 것으로 보인다. 내세에 대한 믿음을 야기하는 것은 이성적 논거가 아니라 감정이다.” (버트런드 러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사회평론, 2005, 124~125쪽)

죽음 뒤에 나의 존재는 완전히 사라지고, 아니 내가 사라진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된다는 결론은 받아들이기 어렵고, 상상하기엔 고통스럽다. 그런 ‘사후세계’를 상상하다 보면 까만 먹장 같은 것만 눈앞에 떠오른다. 나의 죽음으로 온 세계가 사라지는 것이다.

다시는 만날 수 없지만 마음속에 모시고 산다

20여 년 전인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면 그때 나는 ‘환생’이나 ‘부활’ 같은 개념에 매료됐다. “죽음 뒤에 남는 것은 싸늘한 시신뿐”이라는 생각은 아직 하지 못했지만, 이 재밌는 삶이 영원히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은 알게 된 때다.

특히 내가 걱정한 것은 그토록 좋아하고 따랐던 할아버지도 언젠가는 돌아가시게 되리라는 사실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팠고, 그런 헤어짐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몇 번은 ‘할아버지도 돌아가시고 나도 죽은 뒤, 우리 두 사람이 지구 어딘가에서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을 때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스스로 던졌던 기억이 난다. 지구 반대편에서라도 내가 “할아버지!” 하고 외쳐 부르면 그분은 나를 알아보고 대답하실 것 같았다.

그저 나의 공상일 뿐인지 모르지만,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보살펴주고 지켜보는 가운데 내가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영화나 소설의 주인공이 환상 속에서나마 죽은 이와 재회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나는 마음이 뭉클해지고 곧잘 운다. 할아버지는 떠나셨고, 더 이상 그분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그분이 생전에 하셨던 말씀만은 여전히 귓가에 울릴 때가 있다. 적어도 할아버지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내 삶을 돌아보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소중한 사람들이 영원히 사라져버린다는 생각은 마음을 너무나 삭막하게 한다. 그래서 차마 떠나보내지 못하고 그들을 내 마음 한곳에 모시고 살아가는 것 같다. 대통령 선거 이후 잇따라 동료를 떠나보낸 노동자 · 활동가들의 마음도 그럴 것이다. 장례식장을 찾아 오열하는 그들이 부디 먼저 간 사람들로부터 “내 몫까지 잘 살아줘” 하는 메시지를 받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으면 좋겠다. 먼저 간 이들의 보살핌 속에 더 이상 누구도 죽음의 문턱에 다가서지 않기를 바란다. 나에게 할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말이다.

엄동설한에 새해를 앞두고, 먼저 떠난 이들에게 또 도움을 청한다. “오는 한 해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지켜봐주시고 이끌어주세요. 저희를 위하여 기도해 주세요.”

강한 (안토니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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