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명희의 행복선언]

고시생 쉼터의 문을 막 열고 들어서는데 현 군과 마주쳤다. 이 시간이면 학원 강의를 들을 시간인데 의외다. 진지하고 차분한 평소의 모습과 달리 안절부절못하다. 상담실에 마주 앉아 차를 권했다.

“지혜가 헤어지자네요.” 채 말을 잇지 못한다. 올 것이 왔구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현 군의 나이 서른한 살, 고시생이다.

▲ 구례성당, 2010 ⓒ박홍기

젊음의 호르몬을 꽁꽁 묶어 스스로를 유배시키는 땅에 들어온 지 4년, 외환위기, 카드대란, 금융위기로 이름을 바꿔 찾아온 경제위기는 그를 고시촌으로 내몰아냈다.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 어려운 취업난에서 살아남기 위해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휴학을 했다. 아예 일찌감치 고시촌에 들어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가진 것 없는 그가 승부를 걸 만한 데는 고시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한 달을 꼬박 일해도 기껏 88만원을 손에 쥐는 ‘88만원세대’의 청춘이 되고 싶지 않았다. 졸업하면 월급과 정년이 보장되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는 게 최고 목표였다. 그리고 또 하나 여자 친구 지혜와 결혼해서 알콩달콩 사는 것이 꿈이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그도 고시촌에 들어왔다. 3년 안에 합격해서 이곳을 떠나리라 마음먹었는데 애초의 야무진 결심과는 달리 팔팔한 이십대의 그가 어느새 서른한 살이다.

먹고 자고 공부만 하는 삭막하고 팍팍한 고시 생활을 버티게 해준 사람은 대학 동아리에서 만난 지혜 씨였다. 사귄지 8년, 군대 간 사이 고무신 거꾸로 신는다는 위기도 무사히 극복하고 둘은 ‘결혼’을 약속했다. 불합격할 때마다 지혜 씨는 걱정마라고 위로했지만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기만 했다.

고시가 열공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고시도 ‘생활’이고 생활은 ‘돈’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한 뼘 창문, 한 몸 누이면 꽉 차는 침대, 작은 책상, 잠을 자는 고시원은 모든 것이 한 쪽 팔 안의 길이다. 여기에 월 30만 원, 학원 독서실 식대 등으로 한 달에 80만원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돈’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세상과 분리된 전혀 다른 삶이 고시공부다. 오직 경쟁자의 숨결을 느끼며 혼자 밥을 먹고 혼자 공부하면서 마디가 끊어진 인간관계가 절정을 이루는 곳이다. 합격하려면 다른 인생들과 격리 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독서실은 금기 투성이의 영토다. 책장 넘기는 소리 하나에도 신경세포에 스트레스가 솟구친다. 밀폐된 공간에서 긴장과 짜증이 늘어간다. 변해가는 자신을 추스르면서 견뎌야 한다. 고독하고 밀폐된 이곳에서 지혜 씨는 그를 세상과 연결해주는 유일한 끈이었다. 그녀를 만날 때마다 언젠가 자신도 성공해서 세상에 합류하리라는 꿈을 다진다.

시험공부를 하면서 항상 마음에 걸리는 분은 부모님이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도 불구하고 매달 백만 원을 보내 주신다. 평생을 공장에서 맞벌이로 등골이 휘도록 일만 하면서 자식을 대학에 보낸 부모님은 아들만은 당신들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기를 바랐다. 고생하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자신의 선택에 회의도 들지만 가진 것 없는 그에게 경쟁력은 이 길 뿐이라 믿고 승부를 건다.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님께 얹혀사는 자신의 처지가 ‘기생충’처럼 느껴진다. 성탄을 며칠 앞두고 “친구로 남자”며 지혜 씨는 이별을 통보해 왔다. 현 군은 “이제 그만 놔 줘야죠”이별을 받아들인다.

지혜 씨는 결혼을 했다. 매사에 딱 부러지고 야무진 그녀답게 상위 5퍼센트에 들어가는 짝을 만났다. 이제 현 군과 지혜 씨의 순애보는 희미한 추억으로 뒷걸음쳤다. 젊은 그들에게 한때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입술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가난하기 때문에 사랑도 버려야 했다. 가난한 고시생에게는 사랑도 사치다.

요즘 젊은이들의 사랑 풍속도에는 현 군처럼 서로의 ‘차이’를 뛰어넘어 사랑할 수 있는 열정이 없다. 경제적 수준, 학벌, 가족관계 거기다 외모까지 서로 비슷한 사람을 원한다. 조건과 상황이 쳐 놓은 저지선을 뚫을 수 있는 힘,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삶을 이어가게 하는 힘, 힘겨운 인생의 여정에 서로 부축하고 격려하면서 함께 더듬어 가는 동반자로서 생애의 고달픔을 동변상련하며 함께 어른으로 성숙해가는 파트너, 이런 사랑의 관계가 없다. 청춘들에게 연애와 결혼이란 심오한 삶의 시나리오들이 씨앗처럼 숨어있는 사랑의 지도를 따라 서로에게 감춰져 있는 보물을 찾아가는 여행, 그런 아름다운 도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면 이십년 전의 시 ‘가난한 사랑 노래’는 강산이 두 번 변한 오늘에도 심금을 울리는 가난한 청춘의 노래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올해 초 현 군은 고시를 접었다. 고시를 포기하자 직업도 사랑도 결혼도 한 발 더 멀어진 것 같다며 쓸쓸히 고시촌을 떠났다.

심명희 (마리아. 약사. 선우경식기념자활터 봉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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