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부모들의 삶은 완전히 휘발되어 버렸다. 5월의 그 발포 이후.
아이들의 동심은 뿌리째 뽑혔다. 피붙이가 자국 군대의 총에 죽어가는 걸 목격한 이후.
살아도 산 게 아니었다.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다, 이대로는.

같은 고통 속에 삶을 다만 견뎌온 다섯 명이 학살의 주범 ‘그 사람’을 단죄하기 위해 모인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사투를 벌인다. 영화 <26년>은 그런 이야기다. 1980년 5월 광주로부터 26년이 지난 2006년, 만화가 강풀은 웹툰 <26년>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 때로부터도 벌써 여러 해가 덧없이 흘렀다.

 
<26년>의 영화화는 진작 결정되었지만 제작 자체가 수없이 무산됐다. ‘그 사람’의 그림자는 다시 권력의 중심부에 어른거리고 있다. 지난 5년은 ‘그 사람’을 둘러싼 역사가 다시 합리화의 기회를 얻어 활개를 치던 시간들이었다. 영화는 갖은 곡절 끝에 ‘제작 두레’ 형태로 올 겨울 극장에 걸렸다. 그렇게 제작비를 보탠 1만5천여 시민들의 힘으로 태어난 영화였다. 스크린에 새겨진 그 이름들이 엔딩 후에도 10여분간 관객을 차마 일어서지 못하게 한다. 혼신의 힘을 다한 배우들의 얼굴이 오랫동안 눈앞에 겹쳐진다. 워낙 재미와 감동까지 생각하며 잘 만든 작품이라 이미 260만이 본 흥행작으로 연일 기록을 갈아치우는 중이기도 하다.

‘우리’가 그토록 오래 보호해온 그는 누구인가?

동요보다 곡(哭)소리를 먼저 배운 아이들. 꿈꾸는 일보다 피눈물 삼키는 법을 먼저 배워야했던 아이들. 그 아이들도 26년 후에는 삼십대가 돼 있었다. 엄마젖도 못 먹은 핏덩이에서 국가대표 사격선수로 자란 심미진(한혜진 분)만 20대였다. 그들에게 그해 5월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나가버린 넋이 돌아오지 못한 부모들을 보면서, 그 사람(장광 분)의 영화로운 승승장구를 지켜보며 부모가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아이들은 숨죽여 자랐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구부러진 역사가 바로잡힐 거라 믿고 이를 악물었다. 죄 지은 자는 역사 앞에 참회해야 한다. 반드시 그런 날은 올 것이다. 제대로 된 세상이라면 말이다. 수시로 치솟는 울분이 제 심장을 겨누는 칼이 되지 않게 발버둥친 곽진배(진구 분), 오직 이 사회의 ‘최고위층’만이 접할 수 있다는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 혹독한 엘리트 코스를 밟은 김갑세(이경영 분)와 김주안(배수빈 분), (연희동이 있는)서대문경찰서 경찰이 된 권정혁(임슬옹 분). 그들은 살아서 ‘그 사람’이 용서를 빌 날을 볼 수 있기를 빌었다.

그러나 ‘어른이 돼도 경찰이 돼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만 새록새록 알게 됐을 뿐이다. 그 사람이 사는 곳은 겹겹의 성(城)이었다. 구중궁궐이었다. 그 사람의 윤택함을 위해 오늘도 국민의 혈세가 들어가고, 그 사람을 지키기 위해 여전히 많은 사람이 목숨을 걸어야 했다. 그 사람을 지키다 죽는 게 애국이라 믿는 수많은 경호 인력은 대한민국의 최정예 공무원들이다. 누군가의 애국이 누군가를 피토하게 만들며 서로 총격전에 쓰러지는 일은 끊임없이 지금도 되풀이 중이다. “참말로 사는 것이 드럽고 치사하다. 미안하다 누나야.” 자신의 무력함이 죄스러운 권정혁의 눈물은 살아남은 자의 비겁함으로 끝날 것인가. “해서 죽을 수도 있지만, 안 해도 살 수 없다는 거 아시잖아요.”라던 김주안의 결기는 단죄를 성사시킬 수 있을 것인가.

 
자그마치 26년, 그리고 얼마나 더?

“고작 이렇게” 끝내려고 거기까지 간 게 아니었다. “각하의 역사는 정당하시다.”(마성렬/ 조덕제 분)는 ‘들개’들보다는 적어도 오래 살고 싶었다.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었다. 살아서 행복해지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이 아니면, 지금을 놓치면 다시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진배는 그 영원과도 같은 ‘지금’ 이 순간, 미진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데이트 신청을 한다. “미진아! 다 끝내면, 우리도 남들처럼 손잡고 놀이동산도 가고 그러자!”

내전과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역사를 겪은 민족은 집단의 동심(童心)이 송두리째 파괴되고 만다. 스페인 내전을 다룬 영화 <광대를 위한 슬픈 발라드>에서도 이 점을 통렬히 깨닫게 한다. 부서진 놀이동산과 망가진 영혼들을 낳은 진짜 괴물은 내전과 쿠데타의 역사였다. 잘못된 역사를 청산하지 못하는 한, 무엇으로도 망가진 집단의 꿈은 복원되지 않는다. 온전한 놀이동산의 추억 하나 가져보지 못한 찢겨진 유년은, 군사정권이 피바다 위에 세운 제아무리 화려한 ‘어린이공원’으로도 달래지지 않는다.

지금이 아니면 아무것도 바로잡지 못한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해야만, 역사의 잘못된 수레바퀴를 멈출 수 있다. 기도한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이기를, 망가지지 않은 놀이동산을 우리 아이들에게는 반드시 물려줄 수 있게 되기를.

 
 
김원 (로사, 문화평론가)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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