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3일 대림 제4주일: 루가 1, 39-45.

오늘 복음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이야기였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배려로 수태하였다는 말을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듣고, 즉시 길을 떠나 엘리사벳을 방문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리아가 ‘길을 떠나 서둘러’ 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듣는 순간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고도 말합니다. 이어서 나오는 엘리사벳의 말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마리아를 영접한 엘리사벳이 기쁨에 차서 하는 축복의 인사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에 시작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하신 말씀과 행동을 회상하면서 예수님은 당신이 가르친 대로 실천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중심이 된 신앙공동체들은 예수님에 대해 그들이 깨달은 바와 그들이 실천하던 바를 글로 남겼습니다. 오늘 우리의 복음서들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기 전의 일들, 특히 그분의 탄생과 어린 시절에 관한 일들은 그들이 회상할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들이 복음서에 남긴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기에 관련된 기록들은 역사적 사실을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담아 전하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들은 구약성서를 참고하여 이야기들을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가 알아들어야 하는 것은 그들의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인류를 위해 어떤 축복과 기쁨인지를 말합니다. 오늘 현대인은 정확한 사실을 전달하는 데에 일차적 관심을 가지지만, 옛날 사람들은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아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이야기들을 만들어 전하였습니다. 기록하고 전달하는 수단이 지극히 한정되어 있던 시대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쉽게 전달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서 그것이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게 하였습니다. 오늘의 복음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을 수태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갔고, 엘리사벳과 그녀 태중의 아기는 마리아와 그 태중에 있는 예수님을 기뻐 영접하였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대단히 소박합니다. 위대한 것도 화려한 것도 없습니다. 한 여인 안에 장차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생명이 수태된 것입니다. 그 잉태는 마리아를 위대하게 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축복과 기쁨에 넘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를 영광스럽게 혹은 존경 받는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일하시면, 우리는 사람들을 섬기고 그들을 기쁘게 합니다. 오늘 마리아는 서둘러 가서 엘리사벳과 그 태중의 아기를 축복과 기쁨으로 가득 차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수태되면서부터 사람들 안에 축복과 기쁨을 발생시키며, 섬기는 분이었다는 초기교회의 믿음입니다.

하느님은 지킬 계명을 주고, 정성을 바치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지배자들이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축복과 기쁨이십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다스리고 명령하며, 죄인으로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이를 고쳐 주고, 죄인에게 용서를 선포하여, 삶의 기쁨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섬김이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 주는 축복이었습니다. 생명을 주고 살리는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그들을 축복하여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우리가 흔히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재물과 권력입니다. 그러나 재물과 권력이 소중하게 보이는 곳에, 사람들은 정직하지 못하고 무자비하며, 남에게 군림하려 합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에게 빌고 바쳐서 재물과 권력을 얻어 누리려고도 합니다. 하느님에게 많이 바치면, 많이 주신다고, 혹은 하느님의 마음에 들면, 그분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는다고도 말합니다. 그런 말 뒤에는 하느님을 후광으로 재물과 존경을 탐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이 한 일이고, 인류 역사 안에 종교 지도자들이 쉽게 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은혜롭고 사람을 살리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짐 진 여러분은 나에게로 오시오. 내가 여러분을 쉬게 하겠습니다.”(마태 11,28).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죄인이라 버린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11,30)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은혜로우신 하느님, 삶의 기쁨을 주시는 하느님을 가르쳤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에서도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간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축복과 기쁨을 나누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은혜롭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그 은혜로움을 알고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도 은혜로움을 전달합니다. 그것이 선교입니다. 교회가 유럽에서 일찍이 교육과 의료에 눈 뜨고, 그 분야에서 많은 일을 한 것도 교육으로 삶의 은혜로움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고, 생명이 위협받는 사람들에게 의료로써 생명의 은혜로움을 되찾아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가 한 일은 예수 믿어서 구원받으라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깊은 곳, 그 태중의 아기까지도 기뻐 뛰놀게 하는 축복이었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 두 사람이 주인공인 오늘의 복음은 요란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소박한 일상적인 이야기입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만나는 기쁨은 그런 곳에 있습니다. 매일의 일상적 삶 안에 우리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은혜로움을 볼 줄 아는 시선과 아버지의 뜻을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은혜로움을 본 사람은 주변의 사람들과도 그것을 나누어 그들도 같은 기쁨을 체험하게 합니다. 기쁨을 체험한 사람은 이웃도 기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의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한 일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이 주시는 축복과 기쁨을 영접하고 이웃과 그것을 나누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수태되면서부터 축복이고 기쁨이었다는 오늘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이론의 대상도 아니고, 높은 옥좌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분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삶 안에 축복과 기쁨으로 살아계십니다. 그것을 이웃과 나누는 잔치가 되게 하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1964년 파리에서 서품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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