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영의 그날 이후 ②]

천고마비, 하늘은 높푸르고 말은 살찐다는 가을이 이제 다 지났습니다. 사실 이 말은 말이 뛰놀며 클 푸른 초원도 없는 우리나라에서야 별 해당이 없습니다. 열대에서 지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처럼 말입니다.

말이라는 것이 태어난 지 오랜 시간이 지나면 뜻이나 사용처가 바뀌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얼핏 낭만적인 것처럼 보이는 천고마비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천고마비는 늘 북방 기마민족의 침략에 시달리던 만리장성 이남 한족들이 “북방 민족의 말이 여름철에 풍성한 먹이를 잘 먹고 튼튼해 졌으니 이제 곧 쳐들어 올 때가 됐다”고 걱정하던 두려움의 언어입니다.

유목민족의 남하 이유는

물론 북방 유목민이 꼭 가을에만 중국에 쳐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또 가을이 다 돼야만 말이 튼튼한 것도 아니지요. 유목민족에게 가을은 추운 겨울을 대비하는 때이고, 반대로 남방의 농경민족은 풍성한 수확을 하는 때입니다. 바로 이 두 때가 맞아떨어지는 가을이, 유목민족에게는 농경민족에게 털어먹을 것이 가장 많은 때, 그리고 가장 필요한 때입니다. 유목민족은 말이 튼튼해지기를 기다리고, 또 농경민족이 수확을 다 마치기를 기다려 약탈하러 내려오는 것이지요. 요즘 유행하는 음모론적 국제 수탈경제론인 “양털 깎기”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가을이 되면 유목민족이 장성을 넘어 남하하는 것은 마치 봄이 오면 꽃피고 새가 우는 것처럼 자연스런 자연의 순환과정과 같습니다. 북방민족의 땅에 여름철에 비가 많이 내려 풀이 많았으면 적게 내려오거나 아예 내려오지 않을 것이고, 가뭄이 들면 많이 내려올 것이고 너무 심하면 아예 유목지를 남쪽으로 옮기려 할 것입니다. 사실 유목민과 농경민의 마찰은 바로 이런 가뭄 때, 중간에 있던 어떤 토지의 연고권을 둘러싼 갈등이 핵심입니다.

갈수기에 한반도 대운하를

사회현상과 변동을 관찰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인구와 기후의 장기적 변화입니다. 한 예를 들어 최근 조선시대의 강우량을 연구해보니, 19세기 중반부터 1910년까지, 그러니까 기나긴 고종의 치세 대부분의 기간에 조선 땅은 혹심한 장기 가뭄을 겪었답니다. 주변 일본이나 중국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오랜 가뭄으로 조선의 경제 상태는 엉망이 되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사회는 점차 혼란스러워집니다. 지배층은 과거의 기준으로 수입을 유지하려 탐학을 더 심하게 일삼게 되고, 좋은 관리들조차 갖은 대책이 무위로 돌아가면 좌절감과 무력감에 빠집니다. 일반 백성은 크게는 말세의 기운을 느끼고, 작게는 집안 살림 자체가 빈곤하고 불결해집니다.

1900년 전후해서 조선을 방문한 상당수 외국인들이 조선인의 불결한 생활 상태를 꼬집은 것은, 오랜 가뭄과 빈곤, 무기력의 여파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910년에 일본에 주권을 뺏기고 나고, 바로 그 다음해부터 조선 땅은 다시 갈수기를 벗어났다니, 참 조선은 운도 없었습니다. 일제하 조선 땅은 대홍수까지 겪었고, 이 홍수기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답니다. 하지만 이 홍수기는 이제 다시 갈수기로 접어들고 있다는군요.

그렇다면 아무래도 물이 엄청 필요한 한반도 대운하 계획은 그야말로 역사적 삽질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또, FTA가 아니라도 한반도의 농업 역시 패러다임의 적응, 변화가 필요해집니다. 어쨌거나 물 값은 다른 상품 가격이 올라가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올라가겠지요. 상수도 민영화는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 될 것입니다.

독재와 식량의 상관관계

얘기가 잠시 옆으로 샜습니다만, 천고마비의 얘기를 꺼낸 것은 다름 아니라 북한 얘기를 하고 싶어서였습니다. 북한은 일상적으로 식량 부족을 겪고 있습니다. 무역을 통해서든 원조든, 아니면 약탈이든 간에 외부에서 여분의 식량을 확보하지 않으면 인구가 줄어들 수밖에 없는 나라입니다.

북한의 식량 부족 원인에 대해서는 자연재해나 미국의 경제봉쇄 등을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만, 둘 다 근본원인은 아닙니다. 한 예로, 북한에서 식량배급제의 위기가 조짐을 보인 것은 1980년대 중후반부터입니다. 자연재해도 없었고, 미국 대신 사회주의 국제경제체제가 아직은 작동하던 시절입니다. 근본원인은 독재 정권 체제이지요. 독재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시킬 수 있는, 그렇게 하는 것이 선이라고 믿고 있는 정권이 장기간 유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설사 북한 정권이 독재라고 인정해도, 독재와 식량이 직접 관계는 없지 않느냐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일단 독재는 경제 문제가 아니라 정치 문제입니다만, 정치와 경제는 한 몸인고로, 정치가 잘 되기를 우리가 원하는 이유도 결국은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것입니다. 아니, 그러면 박정희식 독재도 잘 먹여 살렸으니 좋다는 얘기냐? 아닙니다. 그 반대이지요. 박정희 식으로 가다가는 나라 경제 절단 나게 생겼으니 반대한 것입니다. 세상에 선한 독재라는 것은 없습니다.

독재는 그저 나쁜 독재만 있을 뿐입니다. 오히려 박정희 추종자 식으로 정치는 나빠도 경제는 좋을 수 있다는 논리를 북한에 적용하는 이들이 문제입니다. 북한에 그런 논리를 적용하면서, 남한에서 박정희 추종자들을 설득하기는 난망입니다. 그러고 보니, 또 얘기가 잠시 옆으로 조금 샜습니다. 북한 경제난과 독재의 관계는 나중에 따로 좀 더 자세히 얘기하지요.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에 관하여

북한이 기본적으로는 대외 강경책을 펴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유화책을 주기적으로 쓰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식량이 부족한 때입니다. 북한도 가을에는 어쨌거나 추수를 해서 겨울과 봄까지는 충분히 날 식량은 확보합니다. 근본적으로는 식량이 부족해서 대외 유화책을 펴서 선물을 받거나, 원조를 얻거나 아니면 약탈해야 하지만, 일시적으로는 여유가 생깁니다. 유화책을 강요당하기까지는 시간적 여유가 생기는 셈입니다. 자기 땅에서 추수하는 것 외에, 중국이나 미국, 일본에게서 한 50만 톤씩 대량 지원을 받는 때가 있는데, 그러면 물론 이런 기간은 더 길어집니다. 이때가 북한으로서는 마음 놓고 강경책을 펼 때입니다. 천고마비입니다.

그리고 식량이 떨어지면 가장 정치적 부담이 적은 데서부터 받으려 합니다. 국제기구가 제일 우선이고, 중국, 미국, 일본, 그리고 남한이 제일 나중입니다. 반대로 여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줄이는 것은 당연히 남한에 대한 의존입니다. 여러분이 김정일 입장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부 보수적 대북 유화론자 가운데는 식량을 지속적으로 북한에 공급해야 북한을 움직일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는데, 이상과 같은 구도를 보면 결코 지렛대가 될 수 없습니다. 남한의 식량 공급이 북한을 움직일 정치적 지렛대로 작용하려면, 남한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가 거의 대북 경제지원을 중단하거나 남한에 대한 북한의 경제 의존이 절대적 수준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북한이 한사코 피하려고 하는 최악의 상황이지요.

먹을 것 없이는 투자하지 않는 것이 자본의 계산

지금 북한이 개성공단을 볼모로 압박하는 것은 일부 탈북자 단체 등 민간단체의 대북 삐라 살포가 주 원인이라고 하지만, 그것보다는 미국에서 민주당의 오바마가 당선되면서 남한과 굳이 거래하지 않고도 미국과 한 방으로 다 해결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서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계산대로 될 지는 미지수입니다. 북한이 외교를 잘 한다고들 하지만, 망친 적도 많거든요.

현재 미국이든, 일본이든 경제난에 국채 규모가 장난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 북한에게 쥐어줄 현금을 짜내기는 만만치 않습니다. 누구는 북한의 지하자원 등을 얘기하면서 남한을 비롯한 자본가들이 경제 불황을 타개할 신천지라고 얘기합니다만, 우습습니다. 북한은 시장 규모라고 해 봤자, 베트남의 몇 분의 일이라서 팔아먹을 것도 별로 없습니다. 철광, 마그네사이트 등 몇 가지 중요한 지하자원이 있습니다만, 왜 이것조차 이웃나라인 중국의 자본도 제대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지, 간단한 리트머스 시험지가 있습니다.

세계 최대의 노천 광산이라는 그 커다란 무산 철광, 종아리까지 바지 걷어붙이고 두만강 건너가면 바로 건너가 중국 땅인데 말이지요. 왜 중국은 아프리카까지 가서 자원을 싹쓸이하면서 북한에는 못 들어가고 있을까요? 먹을 것 없이는 투자하지 않는 것이 자본의 계산입니다. 오히려, 이미 북한의 쌀값이 국제 쌀값과 무관하지 않게 북한도 세계 경제 체제에 상당히 깊이 편입된 마당에, 세계적 경제난이 북한에 긍정적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명박 정권의 대북 정책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속셈은 봉쇄정책이지만, 그것 이외의 세부적인 대안은 없지요. 그런 면에서는 북한의 현 강경책은 이명박 정권에게는 “울고 싶은데 뺨 때려주는” 꼴이 될 것 같습니다.

미네르바 말대로 내년에 꽃피고 새가 우는 시절이 오면 많은 것이 드러나겠지요. 오바마 정권이 북한에게까지 신경을 세세히 쓸 여유가 생기기를 바랍니다. 미국이라는 상대가 가진 판돈 자체가 줄어든 마당에, 북한도 판에서 거둬갈 돈의 목표를 좀 더 낮춰 잡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을까 합니다. 진달래 꽃 지지미는 낭만 선비의 즐거움일 수 있겠지만, 본래는 춘궁기 음식으로 꽃을 따 먹던 추억에서 비롯한 것이지요.


박준영/ 아시아가톨릭뉴스(UCAN) 한국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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