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 정현진]

“강론만 아니면 신부 생활 할 만 할 텐데….” 언젠가 어느 신부님의 농담 같은 하소연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외에도 강론 준비에 대한 부담과 고충을 여러 번 들었는데 이런 증언도 있었다. “4대강 사업에 대해 이야기했더니 미사가 끝난 뒤 한 신자가 조용히 따로 불러내 협박을 하더라.”

강론을 준비하는 사제 못지않게 듣는 신자들도 강론에 꽤 예민하게 반응한다. “강론이 너무 재미없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듣는다. 심지어 강론 내용이 미사 참여 여부를 결정하기도 한다. 역설적으로 강론에 대한 목마름을 증명하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사제의 직무, 미사 참여 여부를 두고 고민할 만큼 강론은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지점을 차지한다. 강론이 그토록 힘든 까닭은 무엇이며, 듣는 이들이 강론에서 찾아야 하는 ‘재미’란 도대체 무엇일까.

ⓒ문양효숙 기자

좋은 강론이란 신앙인으로서의 삶에 ‘질문’을 던지는 것

미사 안에서 하느님과 만나는 것으로 족하다고 여겼던 내가 강론에 민감해진 경험은 고등학교 시절 어느 미사를 통해서다. 학교 인근 성당에서 주일미사를 드렸던 그날의 복음은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에 대한 부분이었다. 당시 주임 신부님은 강론에서 왜 예수님이 제물을 파는 이들과 환전꾼들을 내쫒으며 그토록 화를 냈는지 설명하셨다. 당시 시대적 배경, 유대교 제사장들과 환전상들이 성전을 빌미로 어떻게 사람들을 혹세무민하는가, 그리고 예수의 그러한 행동이 얼마나 위험한 도전이었는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당시 성경에 밑줄까지 치면서 읽고 있던 나름 착한 신자였지만, 맥락도 모른 채 마음에 드는 구절을 골라 위로받기에 머물 따름이었다. 한 번도 그런 의미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고, 들은 적도 없었다. 강론을 들으며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던 나는 지금껏 그 시간을 잊지 못한다. 그 강론이 예수님을 다시 바라보는 시작점이었기 때문이다.

“빛으로 나아가는 것을 꺼려하는 마음은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 바친 예수님의 큰 사랑을 인정하고 고백하며, 그분의 뜻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은총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하며, 주님께서 주신 은총을 활용해 이웃에게 빛과 소금이 되도록 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행복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흔히 듣는 강론 내용들이다. 나는 최근 한 대통령 후보자의 발언에서 위와 같은 강론들을 떠올렸다. “학교 폭력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비정규직 문제는 어떻게 바라보는가?”라는 물음에 그는 시종일관 “심사숙고해서 원칙대로 잘 할 것”이라고 답한다. 묻는 이들은 ‘바로 그 원칙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방법론이 무엇인지’가 궁금한데도 말이다. 결과적으로 그 대답은 그의 철학 없음과 무지만을 드러냈으며, 듣는 이들의 실망을 불렀다.

우리가 듣고 싶은 이야기는 하느님의 뜻, 사랑, 희생, 구원, 믿음, 행복, 평화 등 한결같이 번듯한 낱말만 나열하지만 구체성이 없는 강론이 아니다. 어떤 사랑, 어떤 구원이며, 어떤 신앙인지 듣고 싶고, 그래서 우리 신앙인이 추구해야 할 평화가 과연 무엇인지 사제들은 구체적인 제 삶의 이야기로 답해주길 기대한다.

“사제는 하느님의 말씀을 일반적으로나 추상적으로만 설명할 것이 아니라, 복음의 영원한 진리를 구체적인 생활환경에 적응시켜 설명해야 한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제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 4항’)

교회 ‘분열’을 이유로 일부 신자들의 눈치 보는 강론, 비겁하다
세상일을 함께 읽어내고 질문하며, 삶으로 답하는 공동체

시절이 하수상해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기 어렵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제가 눈치봐야 할 대상은 일부 신자들이 아니라 예수다. 이를 알면서도 ‘교회의 안녕’이나 ‘분열’에 대한 우려를 앞세워 해야 할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것은 비겁하다. 미사 시간에 잡음 없이 ‘아멘’을 외치는 것보다 삶의 가치가 일치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의미를 뭉뚱그리고 듣기 좋은 이야기만 전하는 것도 성경의 진의를 그르치는 심각한 직무유기다.

그렇다고 일방적인 답을 강요해서도 안 될 일이다. 좋은 강론은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라고 서로 질문을 던지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함께 진리의 핵심을 들었다면, 그 다음은 어떤 실천 방법을 선택할 것인지 스스로와 서로에게 묻고, 다양한 삶 안에서 화답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 선순환을 부르기 위해 사제는 편향된 기울기 없이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의 현상을 주의 깊고 폭넓게 살펴야 한다.

상상해본다. 생생한 예수의 삶이 전해지는 강론, 2000년 전의 예수와 지금의 내가 함께 숨 쉬며 대화하는 시간, 말하는 이나 듣는 이가 함께 몰입하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기도의 자리.

요즘 특히나 ‘강론’에 대한 아쉬움이 큰 것은 ‘사회 교리’의 활성화 현상을 바라보면서다. 분명히 고무적인 일이지만, 여전히 ‘사회 교리’를 특별한 그 무엇으로 다루는 것을 보면서 일상적인 가르침과 쇄신의 기회는 ‘강론’에서 마련되어야 한다는 데 생각이 머물렀다. 매일과 주일의 미사 안에서 말씀을 곱씹는 전례가 이뤄지고, 삶 안에서 그것이 구체적 성사로 드러난다면, 그것은 비단 사회교리의 실천 뿐 아니라 우리의 총체적 신앙이 더욱 깊고 풍성히 빛나게 되는 길이며, 매일 하느님 나라에 다가가는 길이라고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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