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6일 대림 제3주일: 루가 3, 10-18. 필립 4, 4-7.

오늘 복음은 세례를 받겠다는 사람들에게 세례자 요한이 요구한 회개가 무엇인지를 알립니다. 회개는 삶을 바꾸는 것입니다. 요한은 군중에게는 옷과 먹을 것을 사람들과 나누라고 권합니다. 세리에게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말라’고 하며, 군인에게는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봉급으로 만족하라’고 타이릅니다. 그 가르침은 당시 유대교가 요구하던 것과는 다릅니다. 요한은 율법을 잘 지키라거나, 성전에 십일조와 제물 봉헌을 잘 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모세로부터 시작한 이스라엘의 신앙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하느님은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분”(출애 33,19)이십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과 제물봉헌이 있는 것은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그분의 일을 실천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사람이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자각하고 그분의 선하심을 이웃에게 실천하게 합니다. 제물봉헌은 인간이 생산한 것을 하느님 앞에 가져와 바치면서,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하느님을 자각하고, 그분의 시선으로 자기가 얻은 소출을 새롭게 보고, 그것을 이웃과 나누는 상징적 의례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이 삶을 바꾸라고 요구하는 것은 자기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는 삶을 버리고,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이웃을 위해 실천하며 살라는 말입니다. 군중과 세리와 군인이 삶을 바꾸는 구체적 방식은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지 않고,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자각하고 그분의 선하심을 이웃을 위해 실천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합니다.

요한의 설교에는 다소 위협적인 부분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요한이 하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보내진 요한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요한의 가르침이 예수님의 복음 선포와 어떤 동질성을 지녔다고 그들이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이 믿고 있는 하느님은 엄한 심판자였지만, 예수님은 하느님을 자비로우신 아버지로 믿으셨습니다.

하느님은 위협적인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율법을 어긴 사람도, 성전에 제물봉헌을 하지 못한 사람도 사랑하십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가련히 여기셨다, 측은히 여기셨다고 자주 말합니다. 그것이 인간을 보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은 가련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면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이 유대교의 대사제와 백성의 원로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당신네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갑니다.”(마태 21,31). 대사제와 백성의 원로들은 율법과 제물봉헌에는 충실하였지만,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도, 사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죄인이라고 단죄하는 세리와 창녀들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였다는 말입니다.

요한의 가르침을 연장하여 예수님이 발전시킨 점은 사람이 하느님을 생각하고 자기 삶을 바꾸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 시대 다른 세례운동가들과 달리, 요한은 세례를 주면서 삶을 바꾸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점을 더 발전시키셨습니다. 다만 요한이 엄하게 심판하실 하느님을 전제하고 말하는 반면, 예수님은 아버지이신 하느님, 자비롭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을 믿고 계십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협하지 않습니다.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를 위해 자기 스스로를 내어주면서 삶을 가르칩니다. 자녀는 부모로부터 삶을 배워서 사람이 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배워 실천하면서 그분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새와 들의 백합꽃을 상기시키면서(마태 6,26-28) 하느님이 얼마나 은혜로운 분인지를 깨달으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큰 잔치에다 잘 비유하셨습니다(루가 14,15-24). 하느님은 우리의 삶이라는 잔치를 은혜롭게 베푸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베풀어진 것이지 우리가 공로로써 쟁취한 것이 아닙니다. 마치 잔치에 사람들이 초대받듯이, 우리는 초대받아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 잔치에 입장하였더니, 세상에는 우는 이도, 고통당하는 이도, 굶주리고 헐벗은 이도 많이 있습니다. 잔치에서 사람들은 베풀어진 것을 자기만을 위한 것이라 욕심내지 않고, 이웃과 나누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서 하느님의 일을 깨닫고 실천합니다. 요한복음서는 “하느님의 자녀 되는 권능을”(1,12) 받은 신앙인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주는 선한 분이십니다. 그분이 베푸신 잔치이기에 우리도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나누고 베풀면서 함께 기뻐합니다. 예수님은 그 실천을 모범적으로 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분개하게 하는, 의롭지 못한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도 인간이 의롭지 않아서 발생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런 불행한 일만 보고, 초대 받은 잔치를 비난과 원망과 성토의 장으로 만들지는 말아야 합니다. 죽음을 넘어 하느님이 살려놓으신다는 것이 부활입니다. 불행을 넘어 은혜로우신 하느님이 일하신다는 신앙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삶을 바꾸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삶을 바꾸되 심판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생명을 베푸신 분의 뜻을 따라 하느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 삶을 바꾸자고 가르쳤습니다. 불쌍히 여기고, 가련히 여기는 하느님의 시선으로 주변을 보고, 베풀어진 우리의 삶을 이웃과 나누는 잔치가 되게 하자는 것입니다. 초대하신 하느님이 베푸시는 분이라 우리도 그 베풂에 참여합니다.

인류 역사는 남을 억누르고 빼앗으며, 행세하는 이야기로 꾸며져 있습니다. 그 역사 안에 태어난 우리도 즐겨 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이 구원인 것은 억누르고, 빼앗고, 죽이는 삶에서 베풀고 용서하는 은혜로운 삶에로 옮겨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가르친 엄한 심판을 자비로운 아버지이신 하느님에 대한 기쁜 소식으로 바꾸셨습니다. 하느님은 축복하고 베푸십니다. 우리도 그것에 참여하여 축복하고 베풀며 기쁨을 나누라는 초대입니다. 초대받은 우리의 삶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울로 사도는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기쁘고 즐겁기만 한 세상은 아니지만, 우리의 삶을 기쁨과 너그러움으로 채색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보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1964년 파리에서 서품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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