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엄마가 뭐냐고, 여자의 삶이란 무엇이냐고 대놓고 묻는 제목의 드라마가 있다. 아니, 있었을 예정이다. 방송 두 달여 만에 MBC 시트콤 <엄마가 뭐길래>는 과거가 되게 생겼다.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시청자 주권 무시행위다.

시청자에겐 끝까지 볼 권리가 있다

10월9일 첫 방영된 <엄마가 뭐길래>는 애초 일일시트콤이었다. 그러다 11월5일부터 정체 모를 월화 (저녁)드라마로 재구성 됐다. 별안간 ‘간판’ 뉴스가 밤 9시에서 8시로 내려온 탓이다. 매일 30분물로 방송되던 것을 월화 1시간짜리로 바꾸면서 극의 호흡은 완전히 끊겼다. 그런 수난 속에서도 보던 시청자들은 계속 봤다. 극이 점점 탄력을 받으며 재미있어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배우들의 호연이 감칠맛 있었다. 기존 이미지와 차별화를 시도한 나문희, 박정학, 박미선, 김서형, 류승수, 유연석, 김새론 등등의 캐릭터도 신선했다. 김병만과 구자명, 안동댁 역의 김혜민 등 감초연기자들도 흥미로웠다.

 
그런데 ‘낮은 시청률’을 이유로 일방적 폐지통고가 보도됐다. 캐릭터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데는 당연히 일정한 시간이 걸린다. 그 정도 시간도 주지 않고 그 많은 배우들을 투입했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이 작품에 출연한 스타들은 헌신짝처럼 버려졌다. 시청자는 앞으로 MBC에선 아예 시트콤을 볼 수 없다고 한다. 왜 이런 무리수를 두는가? 정말 시청률이 이유인가? 뉴스데스크를 비롯해 MBC의 평균 시청률이 바닥을 친 지는 이미 오래다. <엄마가 뭐길래>가 특별했던 게 아니다. 원인이 무엇인지는 일방통행이 어느덧 관행이 된 MBC 측이 더 잘 알 것이다.

120회 예정으로 시트콤을 시작했으면 무조건 120회는 지켜져야 한다. 시청자는 당연히 그런 줄 알고 TV에 눈길을 준 것이었다. 약속을 이행하라. 시청자는 끝까지 보기를 원한다. 제작진도 출연배우들도 몰랐다고 한다. 느닷없이 폐기처분 된 건 ‘고위급’의 지시 때문이라고 한다. 시청자는 허수아비인가? 공중파를 사적 방송으로 착각이라도 한 것인가?

서로 ‘밥값’하라는 가모장적 공동체, 좋지 아니한가!

<엄마가 뭐길래>의 세계는 한마디로 가모장(家母長) 공동체다. ‘나여사 국수전’을 운영하는 나여사(나문희 분)를 중심으로 가족과 이웃, 종업원들이 일종의 생활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나름의 질서는 있으나, 서로의 영역을 침해하지 않게끔, 공동체에 위해를 끼치지 않는 게 암묵적인 규칙이다. 따뜻하고 정이 흐르는 곳이지만, 얌체 짓을 했다가는 국물도 없다. 모두가 힘을 모아 응징에 나서기 때문이다. 이기적으로만 행동하면 버틸 수가 없다. 지속적으로 나여사 주변에서 살려면 이 불문율을 따라야 한다.

기존에 흔히 보던 가부장적 공동체 설정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가부장제의 위선을 비웃고 비트는 게 과거 시트콤이 웃음을 주던 방식이라면, <엄마가 뭐길래>는 서로 보듬으며 재기를 꿈꾸는 공동체를 지향한다. 웃음의 코드가 다르다. 직설적인 풍자방식보다는 다소 더디겠지만 천천히 숙성될 웃음이었다. 억지스런 웃음소리 음향도 뺐다. 더 일상적이고 내면을 모색하는 쪽으로 흐른다. 공감과 솔직함이 되레 웃음을 준다. 유아적인 속물근성까지 식구들에게 다 드러내고 난 뒤, 비로소 ‘나는 여기서 뭐지?’에 대한 정체성 재구성을 하는 게 인물들의 통과의례다.

위계질서도 권위주의도 없고 귀속지위에 따른 이점도 없다. 나여사는 자신의 아들과 딸에게 더 엄격하다. 재산을 물려받을 생각 따윈 발붙일 데가 없다. 실직한 전직 증권사 과장인 아들 정학은 주방보조로, 파산한 딸 서형은 카운터를 보며 어머니 집에 산다. 주방보조로 잔뼈 굵은 스물한 살 구자명보다 더 일이 서툰 정학은, 그저 부지런히 배워 ‘밥값’을 해야 한다. 업둥이로 들어왔지만 나여사를 빼닮은 막내딸 지혜(서이안 분)가 엄마의 신임과 사랑을 받는다. 조카 새론까지 다 아는 반전 없는 ‘출생의 비밀’은 그냥 이 집의 히스토리이며 하룻저녁이면 해결될 에피소드다. 카톡 없이는 절대고독에 빠지는 중딩 새론은 “고모는 그냥 내 고모”라며 한 치 양보 없는 고모에게 빌붙기를 이어간다.

 
나여사의 철학은 ‘사람 구실을 하라. 밥값을 하라’는 것이다. 시장 통 국수집 사장님인 동시에 일수를 부업으로 하는 나여사는 얼핏 고리대금업자처럼 보이나, 실은 사람을 구하기 위한 일종의 마을금고 역할이다. 자신의 ‘감’ 하나만 믿고 조건 없이 돈을 내준다. 평생 내 돈 안 갚은 사람 없었다는 그 ‘사람 보는 눈’이 결국 사람 살리는 따뜻한 손이 되었다. 그게 나문희 여사의 진짜 재산이다.

어머니의 힘, 조건 없이 사람 살리기

자식들은 공부는 많이 했으나, 다들 살짝 외눈박이에 헛똑똑이들이다. 사람 보는 눈 세상 보는 눈도 없지만, 심한 콤플렉스에 시달리기 일쑤다. 며느리 박미선은 경제학 박사지만 오랜 시간강사 생활에 지치고 쪼들려 친구들 앞에서 밥 못 사는 박봉을 설명하다 울어버린다. 그날은 생일인 친구가 내는 날이었던 것도 모르고 말이다. 마스카라가 번진 미선의 얼굴 앞에서 시청자는 웃다가 생각에 잠긴다. 대학강사의 저 자괴감은 과연 개인의 부족 탓인가?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는 소설을 쓰고 싶었던 사위 류승수는, 필명으로 (푼수 글래머인 아내 서형을 모델로) 성인로맨스 ‘레드마담의 사생활’을 써서 드디어 아내 서형에게 옷 한 벌 사주는 남편노릇을 한다. 딱 한 편만 쓰고 말려던 이 에로물의 폭발적 인기는 연재로 이어지고, 가족들에게 정체가 탄로 날까 두려운 그는 007작전을 방불케 하며 전전긍긍한다. 집요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김병만 통장이 팬을 자처했기 때문이다. (실은 밤이 외로운 장모도 ‘레드마담’의 열독자다. 나문희 여사의 은밀한 미소가 얼마나 화사하던지!) 생계형 작가의 비애와 오지랖 넓은 활동형 호인의 딱 걸린 조합은, 둘 다 진지해서 아슬아슬하다.

국수전 주방장 안동댁(김혜민 분)은 나여사가 일수를 처음 시작하게 된 주인공이기도 하다. 사연 많은 인생을 끝내려던 찰나에 희망이 돼준 나여사와 동반자 관계다. 나여사가 속내를 터놓을 수 있는 속내 깊고 솜씨 좋은 여장부다. 병만의 조카 유연석은 해외유학까지 다녀온 수재인데 유기농 농사꾼이다. 그는 농업이야말로 미래산업임을 실천하는 훈남이다.

나여사 국수전을 계속 보고 싶다

이런 사람들을 모두 아우르는 나여사의 세계관은 단순하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밥부터 주라. 물에 빠진 사람은 대가없이 건져 주라. 실수는 용서하되 따끔하게 가르치라. 그래서 자식에게도 공짜 밥은 주지 않는다. 시어머니에서 며느리로 그리고 손녀로 이어지는 이 가모장적 공동체를 이끄는 합심과 협력의 미덕은 식구들을 철들게 만드는 동시에 이웃과 공생하게 한다.

<엄마가 뭐길래>를 보고 있으면 은연중에 민들레국수집도 서영남 대표도 생각난다. 그리고 김 모락모락 나는 국수 한 그릇을 누군가와 나눠 먹고 싶어진다. 계속 보고 싶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아직 시작도 안 됐다. 폐지가 뭐길래, 시청자를 울리는가.

 
 
김원 (로사, 문화평론가)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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