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경 신부의 내 자랄 적에 ①
태어나서 다섯 살 때까지(1940-1944)

 

  막돌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이 작은 이야기를

   이 땅의 청소년들에게 바친다.

   다시는 세상에 사상싸움과

   전쟁이 없기를 기도하면서..

 

  

정호경 신부는 안동교구 사제이며, 현재 경북 봉화군 비나리에 살며 밭작물과 매실나무를 가꾸고,  책을 읽거나 나무판각과 글을 쓰신다.

 

   

 이야기 실마리

• 슬기 : 할아버지, 옛날 얘기 해주세요.
• 할아버지 : 글쎄다!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얘기 말이냐?
• 슬기 : 그것 말구요. 할아버지 자랄 적 얘기 말이에요.
• 할아버지 : 내 자랄 적 얘기가 너한테 무슨 도움이 되겠니?
• 슬기 : 좋은 공부가 되리라 믿어요. 우리 교수님도 권하셨거든요. 짬을 내어서라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아오신 이야기를 채록하면, 산 교과서가 되고 산 역사 공부가 된다고 하셨어요. 제가 사학과 학생이잖아요.

• 할아버지 : 그 교수님 참 좋으신 분이구나! 이 책, 저 책 짜깁기해서 전달된 지식은 삶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 삶에 별 도움이 되지 않겠지! ‘민중자서전’이란 말도 있잖니? ‘자서전’이란 말이 좀 어색하군. 돈도 권력도 글쓰는 재주도 없는 백성은, 쓰는 게 아니라 그냥 말씀하시는 거니까, 자서전보다는 자언전(自言傳)이 맞겠지! 그러니까 제대로 채록된 ‘민중자언전’ 안에는, 역사도 있고 정치 경제도 사회문화도 다 들어있을 테니까! 안 그러냐?

• 슬기 : 맞아요. 할아버지! 음, 할아버지는 1940년에 태어나셨으니까 제2차 세계대전과 해방과 한국전쟁을 어릴 때 겪으셨잖아요?
• 할아버지 : 넌 참 영리하고 기특하구나! 이 할애비가 자랄 적 얘기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기도록 만들고 있으니…… 그럼, 내 자랄 적 얘기를 할 텐데, 한두 시간에 끝날 일도 아니고, 너도 해야 할 일이 있을 테니, 언제 어느 정도 하면 좋겠니?
• 슬기 :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일 저녁 9시에서 10시까지 하면 어떨까요? 할아버지는 평소에 11시 넘어서 주무시잖아요?

• 할아버지 : 좋아! 그럼 오늘부터 시작하는 거다. 그런데 시작에 앞서 한 가지 고백할 게 있단다.
• 슬기 : 예? 뭔데요, 할아버지?
• 할아버지 : 너도 짐작하겠지만, 내 기억력이 시원찮아서 이야기를 제대로 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구나! 심지어 나는 어머니 얼굴도 잊어버렸단다. 열한 살 때 헤어졌는데도 통 기억이 나질 않지 뭐냐. 고등학생 시절 이모님댁에 가서 어머니 사진을 봤는데도 영 기억이 나질 않는 거야. 지난 날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공부할 때, 어머니 모습을 되찾아 보려고 자기분석을 시도해봤지만, 잊어버렸던 몇몇 장면만 되살아날 뿐, 어머니 얼굴은 끝내 떠오르지 않더구나. 또 초․중․고 동기생들이 이름은 물론 얼굴도 잊어버려서 미안해 한 적이 여러차례였어. 그러니 기억나는 것만 불쑥불쑥 얘기하는 수밖에 없어. 이해하겠니?
• 슬기 : 물론이죠. 할아버지! 기억나는 것만 말씀해 주셔도, 저로서는 값진 보물을 캐는 기분이거든요!
• 할아버지 : 고맙구나!
• 슬기 : 그리고 할아버지! 이야기하시는 중에 관련되는 사진을 갖고 계시면, 그때 그때 좀 보여주세요. 그렇게 하면 이야기가 훨씬 더 실감날 거예요.
• 할아버지 : 미안하구나! 내 자랄 적 사진은 딱 한 장 뿐인데, 그것도 내 사진은 아니야. 딱 한 장 있는 그 사진은, 회갑을 맞은 할머니가 아버지랑 찍은 사진이고, 어머니 사진이나 형제들 사진은 한 장도 없어. 언젠가 할머니 생전에 사진이 왜 이렇게 없는가를 여쭈어 본 적이 있었지. 할머니는 대뜸 ‘독한 년! 자식 넷 버리고 간 네 에미가 그랬지, 망할 년!’이라고 하셔서 그게 그런 줄 알았는데, 나중 어른이 되면서 생각해보니까, 사진을 없앤 이는 어머니가 아니라 할머니였다는 게 거의 확실해.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분명하지. 며느리가 원망스러워서, 며느리 사진, 며느리와 함께 찍은 손자들 사진을 모두 태워 없애버린 거겠지.

 

정호경 신부가 살고 있는 비나리 마을 뒷산

 


한참만에 어머니를 찾은 기억

-태어나서 다섯 살 때까지(1940-1944)


• 할아버지 : 내가 태어나기 한 해 전에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내가 태어난 1940년에는 우리나라 사람들 이름을 모두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라는 창씨개명(創氏改名)이 강요되었으며, 온 국민을 일제의 하수인으로 전쟁무기의 부속품으로 만들겠다는 ‘국민총력연맹’이 조직되었다는구나. 그리고 내가 두 살 때인 1941년 12월에 일본이 미국 영토인 하와이 진주만을 습격함으로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지. 그러니 나는 나라 없던 시절 전쟁의 와중에서 태어난 거지.

내 성(姓)은 초계 정(鄭)가야. 서울 공덕동에 초계 정가들이 더러 살았던가 봐. 거기에 사시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머니와 외아들인 아버지는 경북 봉화에서 사셨어. 할머니나 아버지가 할아버지에 대해 무슨 얘기든 하신 기억은 없고, 다만 어디선가 할아버지 사진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기억나는 건 할아버지 수염뿐이야.

나는 아버지 정용시(鄭容時, 1916년생)와 어머니 조춘옥(趙春玉, 1918년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어. 위론 형님 하나, 아래로 여동생 둘, 그리고 막내 남동생, 3남 2녀였어. 모두가 두 살 터울이었지.

• 슬기 : 할아버지, 그럼 형제분들은 모두 어떻게 되셨어요?
• 할아버지 : 나랑 바로 옆 여동생만 살아있어. 막내는 어머니 아버지랑 전쟁통에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고, 형과 여동생 하나는 먼저 세상을 떴지.
• 슬기 : 괜히 그걸 여쭈어 봐서 죄송해요.
• 할아버지 : 아니다! 내 나이가 되면 기쁜일도 슬픈일도 그저 무덤덤해지게 된단다. 더구나 지난지 오래된 일이잖니?
• 슬기 : 그래도 괜히 말씀 중에 끼어들어서 죄송해요.
• 할아버지 : 괜찮아. 관심이 많아서 그런 것이니 좋은 일이지.

다섯 살 때(1944년)까지는 몇 가지 장면만 떠오를 뿐, 그것도 어느 것이 먼저이고 어느 것이 나중인지 모르겠어. 어머니랑 탄광지역인 ‘도계’를 간 적이 있었지. 아버지가 계신 방에 들어가니까, 큰 교자상 위에 돈더미가 내 키보다 더 높게 수북이 쌓여있어서 놀랐어. 내 생전 처음 구경한 돈이 낱장의 돈이 아니라 돈더미였던 셈이지. 어머니에게 ‘엄마 저게 뭐야?’라고 묻자 어머니는 ‘돈이라는 거야. 돈으로 밥도 사 먹고 옷도 사 입고 과자도 사 먹지.’ ‘그럼 저게 다 우리 거야?’ ‘광부 아저씨들에게 줄 돈이란다. 아버지가 광부 아저씨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줄 돈을 봉투에 넣고 계시는 거야’. 라고 하신 것 같다. 그때 아버지는 광산 경리를 하고 계셨지.

어머니랑 그 곳 공중 목욕탕에 갔는데, 물론 어머니랑 여탕에 들어갔지. 탕은 좁은데 아줌마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탕 위로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김은 짙은 안개가 되어 앞을 가리는 데다, 어머니는 저만치 안으로 들어가시고, 나는 어머니를 잃어버릴까 봐 이리 저리 찾아 헤맸지만, 아줌마들의 엉덩이들이 얼마나 큰지 내 앞을 가리는 통에, 한참만에 어머니를 찾은 기억이 나는구먼. 나중 생각이지만, 아이를 뱃속에서 제대로 키우자면 당연히 커야겠지.

춘양에 있던 외갓집에 엄마랑 형이랑 함께 간 적이 있었어. 우리가 왔다고. 외삼촌이 뒷마당에서 닭을 잡는데, 칼로 목을 치니까 목이 떨어져 나간 닭이 퍼덕거렸지. 그런데 그만 외삼촌이 닭을 잡았던 손을 놓아버린 거야. 그러자 목 없는 닭이 피를 뿌리며 온 마당을 돌았고, 그걸 잡느라 한동안 난리를 치루었어. 얼마나 무서웠던지!

그때가 아마도 봄이었던가 봐. 뒷마당에 채소밭을 일구는데, 삽이랑 괭이랑 호미랑, 어른 아이 모두 총동원되어 흙을 파고 있었지.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형이 갑자기 내 머리를 괭이로 찍는 사고가 터졌어. 아마도 내가 형의 화를 돋군 거겠지. 난리가 난 거야. 피투성이가 된 나를 둘러싸고……. 다행히 외할아버지가 한의사여서 뭘 먹이고 뭘 발랐는지 모르지만 낫긴 나았는데, 지금도 내 머리에는 그 상처자국이 남아 있지.

외갓집이 춘양에서 영주로 이사한 직후였을 거야. 어머니는 형만 데리고 영주를 가는데, 나도 함께 가고 싶어 줄곧 떼를 썼지만, 어머니는 매정하게 뿌리치고 버스는 떠나갔는데, 나는 마구 뿜어내는 버스연기와 비포장 도로의 먼지를 마시고 뒤집어 쓴 채, 울면서 죽자고 버스를 따라갔지만, 얼마 못 가서 버스는 유유히 사라지고 나는 길바닥에 엎어져 서럽게 서럽게 울던 장면이 떠오르는군. 그땐 어머니가 나만 따돌린다고 생각한 거겠지.

또 기억나는 건, 다른 아이들은 알사탕도 못 먹던 시절, 나는 가끔 밀크캐러멜(그땐 일본식 영어로 미루꾸라고 했음)을 먹으면서 으스대던 일, 지금의 트랜지스터가 나오기 전 커다란 진공관이 여럿 달린 목조 라디오를 내가 듣기에는 찍찍 웅얼웅얼 소리밖에 안 나는데, 아버지는 열심히 듣고 계시던 모습이 기억나는군. 이때 아버지는 농협의 전신인 금융조합 직원이셨지.

• 슬기 : 라디오에선 전쟁뉴스가 대부분이었겠죠?
• 할아버지 : 그랬을 거야. 일본이 전쟁에서 밀리고 있던 때라, 이른바 성전(거룩한 전쟁)(!)의 승리를 위해 발악할 때였으니까. 물론 거짓말 방송도 많았을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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