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정치와 신앙-2]

로메로 주교는 “박해받지 않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박해 안에서 비로소 순정한 신앙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허용하고, 박해의 종식과 더불어 제국교회로 발전하면서 교회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어부들과 더불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던 예수’를 상실했다. 예수는 권력을 탐하지 않았고, 오히려 ‘섬기는 자’로 오셨으며, 특별히 가난한 이들을 벗으로 삼아 복음을 선포했다. 이러한 비권력적 사회참여야말로 복음적 선택이다.

▲ 1974년 11월 6일 인권회복기도회

박해받는 교회, 가난한 이들의 신앙공동체로 거듭나

한국교회가 한국사회 안에서 자선적 기능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참상을 눈을 뜨고 독재권력에 맞서 싸우기 시작한 것은 ‘박해’ 때문이었다. 무력한 자들의 입장에서 교회가 무력하게 당할 때, 비로소 자신의 신원이 무엇이었는지 교회는 깨닫는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히브리 노예들의 하느님’이었고, 주님이신 그리스도가 ‘가난한 목수 출신’임을 기억한다. 세상에서 배제된 이들의 희망이신 그리스도를 깨닫게 된다. 한국교회는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 원주교구장이던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면서 본격적으로 ‘사회참여’의 횃불을 들고 고난의 대장정에 나섰다.

적어도 박정희 군사정권 초기에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박정희 정권에 부응하였으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경험하고, 1967년 강화 심도직물 사건과 원주 문화방송 부정부패 사건 등을 경험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실상을 접하고 다른 차원의 정치적 참여를 모색하고 있었다. 이는 해방공간에서 보여준 교회의 ‘정치세력화’가 아니라 민중의 고난에 참여하는 방식의 ‘사회참여’였다.

지학순 주교는 마침내 1974년 7월 23일 ‘양심선언’을 발표했다.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72년 1월 17일에 민주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폭력과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지학순 주교가 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형을 받고 감옥에 갇히면서 탄생한 것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다.

정의구현사제단은 교회제도상 공인된 단체는 아니었지만 가장 광범위하고 민주적인 교회조직이었다.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지학순 주교의 구속을 경험하면서 “우리 교회가 서 있는 곳이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바로 지상의 여기, 이곳의 현실 한가운데”라고 고백했다. 1974년 8월 29일 서울교구 소장신부들은 “사제는 예언자적 입장을 지켜 시대적인 요구에 따라 희생해야 하며 예언자적 입장에서 현실참여에 뜻을 같이하는 신부만이라도 함께 행동해야 한다”고 밝혔다.

정의구현사제단 “교회는 정치적 중립지대 아니다”

사제단은 <사회정의 실천 선언>(1974.11.20.)에서 “하느님 나라는 굶주림을 포함하는 인간의 모든 결핍과 수요를 만족시켜주는 기적일 수 없다. 공갈과 협박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스스로의 자유와 존엄성을 비굴하게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하느님은 각 사람에게 신성불가침의 생존권을 부여하셨다. 그러기에 생명을 위협하고 불안과 공포를 조장하면서 불의를 강행하는 자는 그가 개인이든 국가이든 모두 하느님 나라를 거스르는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이는 교회를 ‘정치적 중립지대’로 선포해 온 관례를 깨뜨리는 일이었다. 교회는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자 ‘정치적 선택’을 강요받았다. 호교론적 관점에 길들여져 있던 교회는 당연한 결과로서 지 주교의 구속을 교권침해라는 차원에서 반응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태어난 정의구현사제단이라는 사제운동은 호교론의 울타리를 훨씬 벗어난 것이었다. 사제들은 교계제도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서 양심적으로 행동을 선택할 수 있었고, 그들만의 조직도 가질 수 있었다.

그들은 예전처럼 교도권의 권고에 머무르지 않고 행동했으며, 시국미사를 봉헌하고 시위를 주도했다. 사제들이 앞장을 서면 평신도들과 수도자들이 뒤를 따랐다. 이러한 경험은 수도자들에게 ‘사회에 봉헌하는 예언적 사명’ 안에서 수도자의 새로운 정체성을 확인하도록 요청했다. 1970년대 이후 법정에서, 감옥의 정문 앞에서, 기도회의 현장에서, 그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사제들은 1970년대 역사의 현장에 참여함으로써 그들 자신도 다른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보복받고 탄압받으며 더욱 혹독한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한국교회, 자선남비에서 해방의 요람으로

한국교회는 민족의 아픔에 동참하고 민주화와 인권회복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면서, 1970년대 후반에 “가난한 이들에 대한 복음적 선택”을 분명히 선언하면서 더욱 성숙해졌다. 이러한 선택은 사실상 중남미 교회에서 이미 1968년 메델린에서 공적으로 선언한 바 있지만, 한국교회에는 새로운 깨달음이었다. 1975년 3월 10일 근로자의 날에 명동성당에서 열린 시국기도회에서 김몽은 신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라는 주제로 “근로자는 우리 주님과 가장 가까운 벗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목수 일을 하신 노동자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는 항상 가난하고 성실한 근로자의 교회이며,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한 희망의 교회”라고 강론했다.

▲ 명동성당에서 장준하의 추모미사가 봉헌되고 있다.

바로 이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민주 민생을 위한 복음운동을 선포한다>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에서 “우리는 우리 교회의 사명에 따라 우리 사회에 누적된 비극을 청산하기 위한 민주, 민생을 위한 복음운동을 선포한다. 우리가 선포하는 복음은 이미 죽은 자를 천당으로 인도하기만 하는 복음이 아니며, 구호물자의 도착을 알리는 자선냄비의 복음도 아니다. 고통받는 이웃을 하느님이 창조하신 인간다운 모습으로 되살리기 위한 복음이다. 가난하고 억눌린 자를 위해 우리 교회가 해방의 요람이 되기 위한 복음이다”라고 전했다.

한편 한국교회와 박정희 정권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어, <사상계> 발행인이자 박정희의 맞수였던 장준하(루수)가 선종하자 명동성당에서는 1975년 8월 21일 추도미사가 봉헌되었다. 이날 김수환 추기경은 영결식에서 “장준하 선생의 죽음은 별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더 새로운 빛이 되어 앞길을 밝혀주기 위해 잠시 숨은 것 뿐”이라고 말했다. 장준하는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최후를 맞았는데, 당시 유신정권은 하산 도중 실족사로 발표했으나, 사건 직후부터 박정희 정권에 의한 타살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개인의 정치적 회심과 사회복음화

전두환 정권에서는 1987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박종철군 고문치사 은폐조작사건을 폭로함으로써 6월 민중항쟁의 기폭제로 작용했으며, 조성만 열사의 투신자살 이후 1989년 임수경의 방북과, 문규현 신부 파북 사건 등으로 통일운동에 기여하는 등 한국교회의 사회참여는 지속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 한동안 주춤하던 한국천주교회의 사회참여 움직임에 다시 불을 붙인 것은 용산참사였으며, 이후 4대강 사업과 강정 해군기지 건설 반대, 탈핵운동 등 이명박 정부의 국책사업에 대한 저항운동이 거세게 일고 있다. 최근 들어 사회참여 그룹의 운동방식은 정의구현사제단뿐 아니라 각 교구 정의평화위원회와 수도장상연합회, 그리고 평신도단체들이 참여하는 ‘천주교연대’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 현재 가톨릭교회의 사제들과 수도자, 신자들은 굵직한 국책사업마다 정부와 갈등을 빚고 있다. ⓒ 한상봉 기자

특히 최근 들어 그동안 사회참여활동이 부진했던 대구대교구, 수원교구, 대전교구, 그리고 신생교구인 의정부교구에 정의평화위원회가 신설되거나 재출범하면서 가톨릭교회의 사회참여형 정치행동은 교회 공식기구와 비공식단체들이 동시적으로 연대틀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또한 교회 공식기구인 정의평화위원회는 지난 총선과 이번 대선에서 가톨릭과 비가톨릭을 막론하고 후보자들에 대한 공개적인 정책평가에 나서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권력에 대한 견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대림2주일을 인권주일로 정하고, 이어지는 한 주간을 ‘사회교리 주간’으로 설정하고 있는데, 이 역시 12월 19일에 치러질 대통령선거가 임박한 시기여서, 교회가 신자 유권자들에게 의미 있는 투표를 독려하는 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번 대선 과정은 교회가 매 순간 선포하는 복음이 추상적인데 머물지 않고, 개인의 정치적 회심과 사회복음이 될 수 있는 살아있는 배움터가 될 것이다. 교회가 스스로 정치세력화를 이루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으면서, 한국정치 자체를 복음화 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절박한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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