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의 영성과 가톨릭일꾼운동의 한국적 적용-3]

자비의 실천, 환대의 집

‘가톨릭일꾼운동’의 공동창립자 피터 모린은 5세기의 교회 공의회가 주교들로 하여금 교구마다 ‘환대의 집’을 만들게 했다는 기록을 보고 기뻐했다. ‘환대의 집’은 가난한 이, 병든 이, 고아, 노인, 여행자, 순례자 등 곤궁한 사람들에게 열려 있었다. 이 집은 “내가 낯선 사람이었을 때 네가 받아들였다”는 성경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

“물질적인 자선행위는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고, 헐벗은 사람에게 입을 것을 주고, 갇힌 사람을 풀어주고, 집 없는 사람에게 안식처를 마련해 주고, 병든 사람을 방문하고, 죽은 사람을 묻어 주는 것입니다. 피터 모린이 자선행위의 필요성에 대하여 말할 때, 피터는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 그는 우리가 주택공제, 사회규범, 사회보장에 책임감을 갖되, 개인적인 책임감을 실행하는데서 한 걸음 나아가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던진 말,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는 말을 수없이 되뇌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 우리는 자선행위에 따라 심판받을 것입니다.”(<도로시 데이와 함께 하는 기도>, 제임스 알레어. 로즈메리 브로턴, 성바오로 1998. 77-78쪽)

▲ 환대의 집에서는 가난한 이들의 당장에 필요에 응답했다. (사진출처/유튜브 Dorothy Day Documentary: Don't Call Me a Saint 갈무리)

피터가 보기에 ‘환대의 집’은 따뜻한 안식처 노릇을 할 수 있으며, 독서실과 직업훈련을 제공할 수 있고 기도와 토론과 공부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교구에서 그런 집을 후원해야 하고 사목의 필수적인 요소로 삼아야 한다고 여겼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친구만을 환영하고, 낯선 이를 돌보는 일은 전문가에게 맡겨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반대하였다. 사랑과 자비의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이며 생활의 한 부분으로 여겨야 한다. 어느 집이나 하느님의 대사를 받아들일 ‘그리스도의 방’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낯선 얼굴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고 그리스도가 말씀하셨다.

‘환대의 집’을 요청하는 기사가 신문에 실리자 집 없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찾아와 신문에 실린 집을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었다. 도로시 데이는 즉시 아파트를 빌렸고 얼마 안 가 아파트가 더 필요하게 되자 찰스가에 건물을 얻게 되었다. 급식행렬도 마찬가지여서 예상치 못한 상황이 시작되었다. 환대의 집에는 항상 따뜻한 커피와 수프와 빵이 준비되어 있어 누구든지 들어와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이 소문이 퍼져, 1936년엔 수백 명의 사람이 도로시의 집 앞에 줄을 섰다.

가톨릭교회에서 세운 다른 많은 단체들과 달리 ‘가톨릭일꾼의 집’에선 아무도 설교를 하지 않아서 사람들은 의아해 하였다. 다만 벽에 걸린 십자고상만이 유일하게 이들이 그리스도인임을 알려주었다. 자원 봉사자들은 숙식과 가끔 용돈 정도만 제공받고 월급 없이 일하는 사람들이다. 점차 다른 지역에도 이런 집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여 10년 만에 30채 이상으로 불어났다. 각각의 집들은 뉴욕 본부와 관계를 맺으면서 신문을 통해 함께 준수해야할 원칙을 천명하면서, 환경과 필요에 따라서 나름의 조직과 방식을 채택하여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

일꾼의 집에 자주 오는 사람들은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담배 피는 조, 이탈리아 사람 마이크, 미친 폴 등이다. 그 사람들은 일꾼의 집을 제 집으로 생각하여 잡일을 돕기도 하고 항상 똑같은 의자나 구석에 앉기도 하고 같은 침대에서 자기도 했다. 일꾼의 집은 무정부적 경향이 있어서 단속과 제한, 규칙을 철저히 거부했으며, 온갖 배경을 갖고 있는 개인들에 대하여 너그러웠다. 이 공동체에선 구성원의 개인적, 이념적 대립을 세심하게 감싸 안으며 그들에게 오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한 식구로 맞아들였다. 언젠가 사회사업가 한 사람이 도로시 데이에게 밑바닥 사람들이 얼마나 오래 이 집에 머물 수 있는지 물었다. “영원히요. 우리와 살고 우리와 죽고, 우리는 가톨릭식 장례를 지내줍니다. 죽은 후에 필요한 비용도 대줍니다. 일단 들어오면 가족의 일원이 되지요. 아니면 과거에 가족의 일원이었던 사람이 되고요.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형제자매입니다.”
 

▲ 환대의 집은 가톨릭일꾼운동의 요람이기도 했다.(사진출처/유튜브 Dorothy Day Documentary: Don't Call Me a Saint 갈무리)

공부와 노동의 통합, 농경공동체

피터 모린이 제안했던 다른 중요한 프로그램은 시골에 농경공동체-농경대학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도로시 데이는 훨씬 도시적이었으나 농촌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피터의 생각에 동의하였다. 뉴욕 가톨릭일꾼운동은 1936년 펜실바니아주의 이스톤에 22에이커의 땅을 샀다. 이 농장에 사는 사람들은 학자들, 노동자, 집 없는 사람, 대학생, 엄마와 아이들이었는데, 작물을 키우고, 주말엔 원탁토론을 하였으며, 여러 가지 주제를 공부하기 위해 여름학교를 열기도 하였다. 공부하러 오는 사람들 역시 머무는 동안 농장일을 도울 것이었다. 이때는 공황기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산업화와 도시화가 가져오는 심각한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피터 모린은 농촌에서 태어나 자라난 사람이었으며 땅에 되돌아가는 것을 그 해답으로 보았다.

피터 모린은 농경공동체가 공황기에 머물 곳과 음식을 마련해 주어 사람들의 즉각적인 필요에 응답할 수 있으며, 산업경제 자체에 내재되었다고 생각한 순환적인 실업의 문제를 약화시키고, 나아가 보다 안정되고 정의로운 사회질서를 확립하는데 기여하리라고 생각했다. 농경공동체는 농작법과 수공제조법을 도시거주자들에게 훈련시킬 것이며, 이러한 훈련과 양성은 또한 점차적으로 땅과 마을공동체 중심의 생활방식으로 되돌아갈 길을 마련할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농작과 손노동으로 이윤보다는 실용적 필요에 따라 생산하도록 이끌고, 나아가 협동의 가치관과 영적 차원을 다시 발견하는 바탕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피터 모린은 농촌생활은 도시생활과 다른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여겼다. 땅에서 사는 것은 협력과 필요한 만큼의 경제를 장려한다. 도시의 인위적인 세계보다 땅에서 살적에 인생철학은 기계적이기보다 유기적이 되며, 개인적이기보다 가족 중심적이 된다. 아이들이 환영받으며 노인네들은 존경을 받는다. 이렇게 농작과 수공업 문명 속에서 책임감이 회복되고 노동의 전체성(통합성)이 살아나면 자기존중감과 존엄성이 살아날 뿐만 아니라 노동자가 ‘배움’을 사랑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는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 인격적 상호의존성을 높이고, 각자가 공동체에서 중요한 봉사를 하겠다는 책임감을 지니고 만든다.

▲ 환대의 집은 봉사자들의 자비행에 기대어 운영되었다. (사진출처/유튜브 Dorothy Day Documentary: Don't Call Me a Saint 갈무리)

가톨릭일꾼운동 초기에, 이 농경공동체들은 미국 전역에서 싹을 틔웠다. 공동체들은 다양한 크기였으며 어떤 식으로든지 가까운 도시의 가톨릭일꾼 환대의 집과 연결을 가지려고 노력하였다. 이스톤에 있는 농장에는 1938년에 50명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오트밀, 옥수수, 감자, 복숭아와 사과나무, 그리고 각종 과일나무들을 키웠다. 그들은 마당에 빵 굽는 오븐을 걸어두려고 했고 신발을 수선하고 옷을 깁고 매일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경당도 세웠다.

공동체 운영 과정에서 가장 특별한 것은 이른바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농부와 목수, 전기 기술자들, 하수도 기술자들의 협력이다. 이 전문가들은 공동체 구성원이기도 하고, 때로는 이웃사람들, 혹은 도시의 가톨릭일꾼 공동체의 친구들이기도 하였다. 함께 일을 하면서 그들은 친구가 되었고, 서로에게서 배우며 그리스도교의 사랑과 생활방식을 자신들의 삶에서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공동체에서 농사를 지으려는 사람보다 먹으려는 사람이 많았고, 들일을 하려는 사람보다 신학이나 정치토론을 즐기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계란 하나를 두고도 몸싸움이 벌어지곤 했서, 피터 모린은 여름내 계란과 우유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일도 발생했다. 이를 보고 도로시는 “정의가 먼저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자기 것을 챙기는 데 열심이었고, 극기를 실천하는 데는 꼴찌였다”고 한탄했다.

1949년 피터가 세상을 떠날 무렵부터 농경공동체의 성격이 바뀌기 시작했다. 도로시 데이는 이 농경공동체를 ‘땅에 있는 환대의 집’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도로시는 가톨릭일꾼운동의 목표가 교회를 가운데 두고 여러 가족들이 평화롭게 모이는 모범적인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가난한 사람들이나 이런저런 장애로 고생하는 이들에게 특별한 봉사를 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도로시는 배가 고파서 줄을 섰다가 가톨릭일꾼운동을 알게 되어 거처를 시골로 옮겨 오게 된 사람들을 위한 ‘환대의 집’으로 농장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피터의 구상이 너무 높은 목표를 가졌던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동시에 농장은 집단이나 개인이 피정의 장소로 사용할 수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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