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이야기-백동흠]

택시 손님을 태우고서 시내를 지나다가 오늘도 몇 번을 만난다. 연말이 되면 늘 그 자리에 서서 흐뭇하게 웃고 있는 퀸 스트리트 산타 할아버지! 오클랜드 한 복판 퀸 스트리트 위콜스 건물 위에 집채 덩이 풍모를 자랑한 채 올 연말도 시민들과 함께하고 있다. 오가는 차량과 사람들에게 친근한 모습으로 윙크하고 있다. 벌써 십 수년째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면 루돌프 사슴을 데리고 어김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백동흠
빅토리아 스트리트를 내려오다 빨간 신호등 앞에서 브레이크를 밟자마자 휴대폰 카메라로 재빨리 산타 모습을 찍는다. 찰칵! 옆에 탄 나이든 손님이 하하하 웃는다. 손님을 내려놓은 뒤 여기 저기 아는 이들에게 크리스마스 미리 보기 선물로 카톡 전송을 하니 반응들이 제 각각이다. 곧 바로 온 회답이 생동감 있다. “아니, 벌써 산타가 왔어요? 세월 참 빠르네. 늘 그 자리. 제 선물도 가져왔어요?” 고국 서울 아들한테서도 응답이 온다. “캬! 또 오셨네, 저 싼타! ㅎㅎ” 호주 시드니 선배도 한마디 건네 온다. “10 년 전 향수가 물씬 풍겨오네 그려.” 퀸 스트리트 산타는 옛 기억 서린 오클랜드의 추억으로 남아져서 명물이 됐다.

벌써 올해도 종착역에 이르렀다. 선물 가득 싣고 온 빨간 산타 앞에 서서 착한 아이처럼 손 내밀고 싶은 계절이다. 이런 마음을 어찌 알았을까. 모든 이들을 산타 앞에 불러 놓고 대 축제의 자리가 펼쳐졌다. 마음껏 즐기고 서로에게 선물이 되어 주는 날, 산타 퍼레이드 날이다.

시내 주요 도로를 비워내고 파랑색 선을 그으니 미음자(ㅁ) 퍼레이드 코스다. 메요랄 드라이브를 출발해 퀸 스트리트, 커스텀 스트리트, 알버트 스트리트를 거쳐 수많은 가장 행렬 차와 행사 참여 팀들이 도로를 다 메우고 흥겹게 시가행진을 한다. 어린이부터 나이든 사람까지 많은 사람들이 구경나와 온 시내가 인산인해다. 이민 국가 뉴질랜드에 여러 나라 고유 전통을 살린 산타 차량 가장 행렬이 불꽃을 튀긴다. 기발하고도 요란하다 못해 현란하다. 축제 분위기가 무르익어간다. 어디서 강남스타일 노래가 들려오는가 싶어 보니 외국 어린아이들이 이 노래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며 행진을 한다. 늘 그 자리에서 올 연말에도 신명나게 펼쳐지는 산타 퍼레이드가 시민들에게 친근한 놀이마당이 되니 흐뭇하다.

추억할 수 있는 늘 그 자리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던 기억을 떨쳐내고 새 힘을 얻는다. 일상생활 속에서 열심히 살다가 때때로 놀이와 휴식을 가지며 자신을 되돌아보는 저마다의 늘 그 자리가 필요한 때이다.

저물어 가는 한 해를 되돌아본다. 바쁘게 지내는 중에 내 삶의 방향을 다시금 가다듬게 해준 사람이 떠오른다. 산에서 만난 사람과 책방에서 알게 된 사람이다. 택시 운전으로 약해진 다리에 근육 운동이 필요해 큰맘 먹고 시간 내서 꾸준히 주말 등산을 하면서 산처럼 풋풋한 사람을 만났다. 내가 온 종일 앉아서 일을 한다고 하니, 그는 종일 서서 일을 한단다. 그래서 몸 풀이가 필요해 시작한 등산이다 보니 서로 속내도 공감이 간다. 주말 등산에 가서 보면 동료들 챙기는 모습이 늘 그 자리에 활력을 불어 넣는다.

운전하다 틈나는 대로 가슴에 와 닿는 책을 읽으면서 난 언제 이런 책 한 번 써 보나 생각하던 중 책방에서 좋은 책처럼 진솔한 사람을 만났다. 문학상 수상 경력도 있는 그는 글쓰기 내공이 충만해 있어 독학 글쓰기를 해온 나에게는 고마운 배움터다. 작품이나 글쓰기에 대해서 듣다 보면 깊이 있고 진지한 속마음이 전해져 온다. 좋은 책을 읽는 것 같아 늘 그 자리가 여유롭게 느껴진다.

택시 운전을 하다 보면 자주 가는 곳이 있다. 운전하다 휴식이 필요할 때는 오클랜드 도메인 공원에 있는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 향한다. 땅 바닥위로 나온 뿌리줄기가 딱 앉기 좋은 간이 의자 같다. 거기에 앉아 점심 도시락을 먹기도 하고 후식으로 책을 읽기도 한다. 부처가 득도한 보리수나무 아래 같기도 하고, 예수가 군중들에게 산상 수훈을 외친 곳처럼 느껴져 자유롭고 편안한 안식처다. 쉼터이자 중간 충전소로 나의 늘 그 자리다.

하루 일을 마치고 저녁 바람 소소히 이는 창밖 데크에서 아름답게 물드는 저녁노을을 우두커니 바라보곤 한다. 치열하게 현실적이기도 했던 낮 동안의 생각과 행동이 얼굴 붉히는 부끄러움으로 스러진다. 나를 되돌아보는 편안한 늘 그 자리다. 고향 같은 편안함으로 남아지는 늘 그 자리가 그리운 계절이다.

백동흠 (프란치스코)
뉴질랜드에서 택시 기사로 일하며 틈틈이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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