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과 산책나온 시]


당신의 족한 은혜가 모자라
오늘도 이렇게 왔습니다.
채워도
채워도
늘 모자라는 나의 전대는 욕망의 항아리

내 서있는 곳이 광야라면
어김없이 만나와 메추라기 주셨으련만
그 새벽을 못 기다려
내 조바심은 의심과 불평을 자아내고

그리하여
나의 항아리에 쓴물이 가득 고일 때면
나뭇가지하나로 찾아오시는 당신.

당신의 족한 은혜가 그리워
오늘도 이렇게 왔습니다
모자람도
남음도 없는 하늘의 섭리를
겨자씨 한 알로 품고 싶어 당신께 나아옵니다.

-기도

“모세가 주님께 부르짖으니, 주님께서 나무 하나를 보여주셨다. 모세가 그것을 물에 던지자 그 물이 단물이 되었다.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백성을 위한 규정과 법규를 세우시고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백성을 시험하셨다.”(탈출 15,25)


 

 

 

 

 

 

 

 

 

 

 

어느 분이 그러시더군요.
사람이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자신의 두려움에 대한 강박관념일 뿐이라고...

사람이 사랑을 자꾸 말할 때는
오히려
사랑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라고.

물고기가 물속에서 목말라 한다.
신비주의 시인이었던 까비르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나는 신의 존재를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신에 대해 말하지 않는 그들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신과 함께 있는 사람들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만,
교회 안에서도 가장 믿음을 강조하는 일단의 사람들이
자기주장의 절대성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또 그러한 사람일수록
자기 안에 억눌린 본능과 그로 인한 상처들이... 피 흘리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무엇이든 이미 하나인 사람은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함께 있을 뿐입니다.

왜 사람들이 무념무상의 상태를 희구하며 명상을 하는 것일까
어쩌면 바로 그때가
온전히 나와 신이,
아니면 이 존재계와 합일하는
그리하여 우리가 이미 하나라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부재가 느껴질 때,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엄마를 찾습니다.

이미 함께 있지만
때로 신의 부재가 느껴지는
그래서 목말라 하는 사람들...

나는
오늘도 그 어리석은 사람들 가운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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