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의 영성과 가톨릭일꾼운동의 한국적 적용-2]

가톨릭일꾼운동, 푸른 혁명(Green Revolution) 위해 신문 발행

▲ 피터모린 (사진출처/유튜브 동영상: Dorothy Day and the Catholic Worker Movement 갈무리)
도로시 데이에게 영감을 주었던, 피터 모린은 1877년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의 한 소작농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리스도형제회’에서 교육을 받고 당시에 혼란에 빠져 있던 프랑스에서 가톨릭 인민주의를 주장했다. 1909년 아메리카로 건너와 캐나다에서 농장경영에 실패한 뒤에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 미국 뉴욕주로 왔다. 그 후 20년 동안 미국 동부와 중서부를 가로지르는 유랑생활을 하며 닥치는 대로 막노동을 하며 살았다. 피터 모린은 그러한 힘겨운 노동을 하느님의 선물이라 믿고 그러한 자신의 삶에 만족했다. 성 프란치스꼬처럼 ‘거룩한 가난’을 신부로 받아들여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빈민가 싸구려 식당에서 밥을 사먹고 어디서든 잠을 잤다. 그렇게 하여 번 돈으로 책을 사보거나 자기보다 더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가톨릭 급진주의자였던 피터 모린은 성경과 성인들의 삶, 그리고 교황회칙 등에 근거하여 새로운 사회질서를 세우기 위한 종합적인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었다. 피터가 제안하고 도로시 데이가 시작한 가톨릭일꾼운동의 프로그램은 애덕행동과 개인적인 희생으로 굶주리고 가난한 이들을 먹이며 입히고 있을 곳을 마련해주는 환대의 집들과 농촌경작공동체 그 이상을 지향했다. 불의한 사회질서의 희생자들을 위로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으며 불의한 질서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 혼란스럽게 갈라진 세계에 평화, 질서, 그리고 정의를 가져오기 위하여 도로시와 피터는 기도, 손노동, 공동체의 단순한 생활방식, 환대, 공부와 전례를 제안하였다. 이 두 사람은 아일랜드의 수도승들과 초기 베네딕도회 수도승들이 비폭력적인 혁명으로 중세기 암흑시대를 구했던 것처럼 현시대의 어둠에 빛을 가져오기 위하여 똑같은 혁명적인 방법들로써 새로운 사회를 창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피터 모린은 자본주의를 경멸하면서도 역사법칙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지배라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신념, 이른바 산업주의와 진보에 대한 견해를 불신했다. 오히려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란 폐지되어야 하며, 노동자들이 기계부속처럼 일하고 모두 공장 굴뚝만 바라보는 산업사회 역시 전부 해체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대신에 그 자리에 도시와 농촌,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올바른 균형을 꾀한다는 측면에서 분산화된 경제체제가 들어서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피터는 강제가 없는 협동하는 사회, 공예가와 장인들이 스스로 조그만 공장의 주인이 되는 사회를 꿈꾸었다. 그리고 농경공동체에서 학자와 노동자가 함께 땀을 흘리고 함께 생각하는 ‘노동자-학자의 융합’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한편 피터 모린은 경신(敬神: Cult), 경문(敬文: Culture), 경작(耕作: Cultivation)의 종합을 이상으로 삼아, 인간이 더 선해지기 쉬운 사회를 ‘낡은 사회의 껍질 안쪽’에 만들 수 있는 ‘푸른 혁명’을 갈망했다. 이러한 혁명은 ‘객관적 상황’이 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으며, 그리스도의 계명이 우리 앞에 있으므로 우리는 이 말씀에 살을 붙이고 복음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과정에서 피터 모린이 제안한 3단계 프로그램은 ① 사고의 정화를 위한 원탁 토론 ② 애덕 실천을 위한 환대의 집 운영 ③ 노동자가 학자도 될 수 있고 학자도 노동자가 될 수 있는 농경공동체의 건립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들을 선전하는 급진적인 가톨릭 신문을 만들자고 하였다.

목소리 없는 자의 목소리, ‘가톨릭일꾼’ 신문

▲ 가톨릭일꾼신문 (사진출처/유튜브 Dorothy Day Documentary: Don't Call Me a Saint 갈무리)
피터가 처음에 제안한 신문의 이름은 <가톨릭 급진주의자>였다. 겉치레 해결책에 만족하지 않고 개인적, 사회적 문제를 뿌리까지 찾아보겠다는 것이다. 피터 모린과 도로시의 급진주의는 그 주변을 둘러싼 무정부주의적 성향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실상 토마스 머튼은 동방사막의 첫 번째 수도승들을 콘스탄틴 전환 이후에 제도화된 교회를 떠나 사막으로 들어간 ‘무정부주의자’라고 추정했다.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말한다. “무정부주의자들, 이 이름은 도로시와 다른 많은 가톨릭일꾼들이 끌어안은 이름으로서, 부패하고 퇴폐적인 정부에 의해 소극적으로 혹은 수동적으로 인도되거나 지배받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들이며, 다른 방식의 삶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도로시 데이는 새로 발간할 신문의 이름이 편집자가 누구인지 밝히는 것보다 독자가 누구인지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가톨릭일꾼>이라는 이름을 택했다. 두 사람은 모두 신앙을 당시의 사회문제와 결부시킬 방법을 찾고 있었지만 기질과 배경은 서로 달랐다. 피터의 뿌리는 땅에 있었고, 그의 사상은 개인적이고 지역적이라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피터는 중세 아일랜드 수도사들에게서 모델을 찾았다. 그러나 그보다 스무 살이나 어렸던 도로시는 도시 출신으로 노동조합, 대단위 정치운동, 계급투쟁의 세례를 받은 세대였다. 그러한 두 사람을 동역자로 삼으신 하느님의 섭리가 오묘하다.

<가톨릭일꾼> 신문은 도로시의 부엌을 편집실 삼아 시작하였다. 자금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 걱정할 때, 피터 모린은 이렇게 말했다. “성인의 역사를 보면 자본은 기도를 통해서 얻어집니다. 하느님께서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보내 주십니다. 인쇄비를 댈 수 있을 거예요. 성인들의 일생을 읽으면 알게 됩니다.” 이 말은 신문뿐 아니라 가톨릭일꾼운동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톨릭일꾼운동은 규정도 없고 재단도 이사회도 없다. 불안전함 가운데, 취약함 가운데 자신을 놓음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의탁을 가능케 한다.

<가톨릭일꾼> 신문은 누구나 사 볼 수 있도록 푼돈으로 배포했다. 현재 <가톨릭일꾼>은 1년에 7회 발행하는데, 1년 구독료는 25센트(약 250원)에 지나지 않는다. 이 신문은 1933년 5월 1일에 2천 5백부가 뉴욕 유니언 광장에서 공산주의 집회 때에 뿌려졌다. 그런데 2년도 안 되어 발행부수가 15만부로 껑충 뛰었다. 가톨릭신앙의 눈으로 사회문제를 다루는 신문에 호응하는 사람들의 수가 급속히 불어났다. 그 지역의 신학교와 교회에서도 수십 부를 주문했다. 열성 청년들이 길거리로 나가 신문을 팔았다. 독자들은 다른 종교, 정치 계통의 신문에서 볼 수 없는, 특별히 가깝고 가정적인 느낌의 <가톨릭일꾼> 신문만이 갖고 있는 목소리를 발견하였다. 원칙이 있고 뉴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친구끼리 편지라도 교환하듯이 쓴 글이었다. 전국적인 규모의 신문들이 소홀히 하기 쉬운 특정한 동네 그리고 지역의 냄새와 소리와 작은 사건들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로시 데이는 1952년 4월 <가톨릭일꾼> 신문에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비참함과 가난한 이들의 신음은 그리스도의 고통을 만드는 세계 고통의 한 부분”이라고 하면서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그는 특별히 리지외 소화 데레사 성인의 ‘작은 길의 영성’을 소중하게 여겼는데, 데레사의 가르침이 갖는 사회적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작은 행동이 지닌 의미! 우리가 실행하지 못한 작은 것들의 의미! 우리가 하지 못한 항의들, 우리가 선택하지 못한 기준들!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작은 행동의 의미에 대하여 숙고가 필요하다. 우리는 생명을 선호한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인간의 형제애를 위하여 일하고자 한다. 소수인들, 소수의 사람들만이라도 불의에 저항하여 외칠 수 있고, 이 세상에서 인간이 만든 고통에 대항하여 굶주리고 집 없는 이들, 일이 없는 이들, 죽어가는 이들을 대신하여 외칠 수 있다고 믿는 ‘고집 센’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행동하려고 노력한다”고 하면서 소리 내어 울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을 대신하여 “말해야 하고 써야 한다”고 전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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